고장 난 기기 속에서 시작되는 하루
서울 성북구의 한 골목, 간판조차 없는 허름한 작업실에서 박기문(가명) 씨의 하루는 전자제품의 고장음을 듣는 일로 시작된다. 그는 중고 전자제품 수리 전문가로 20년 가까이 일해온 베테랑이다. 고장 난 믹서기, 소리 안 나오는 라디오, 화면이 꺼진 노트북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그의 작업대 위에 놓인다. 그의 고객은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해 수리를 맡기는 이들이 아니다. 오래 사용한 기기에 애착이 있거나, 고장이 나도 폐기 대신 수리를 택한 환경을 생각하는 시민들이다. 그는 도착한 물건을 하나하나 분해하며 문제의 원인을 찾고, 가능한 한 원부품을 활용해 복원해낸다. “이 기계 안에는 주인의 추억이 들어 있어요. 그냥 버리기엔 아깝죠.”
기술과 감성의 경계에서
박씨는 단순히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래된 전자기기를 수리하며 최대한 원래의 기능과 외형을 보존하려 노력한다. 특히 1990~2000년대에 제작된 국산 전자제품의 경우 이미 단종된 부품이 많아, 해외에서 수입하거나 직접 재조립하는 일이 잦다. 어떤 날은 전선을 땜질하고, 또 어떤 날은 기판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미세한 접촉불량을 잡아낸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박씨는 이를 통해 제품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가끔 손님들이 수리된 기계를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해요. 특히 돌아가신 부모님이 쓰던 라디오나 카세트 같은 경우엔요."
전자폐기물에 맞서는 실천
대한민국에서 매년 버려지는 전자제품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마트폰, 모니터, 전자레인지 등은 고장이 나면 수리보다는 교체가 먼저 떠오르는 시대다. 그러나 박씨는 이 순환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수리를 통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전자제품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역 커뮤니티나 환경단체와 협력해 전자기기 수리 워크숍을 열고 있다. 워크숍에서는 간단한 납땜부터 노후 부품 교체법까지 시민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한 번이라도 자신이 직접 기계를 고쳐본 경험이 있으면, 다음엔 쉽게 버리지 않아요."
박씨가 그리는 미래
박씨는 앞으로 더 많은 수리 전문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그는 현재 고등학교나 직업훈련센터에서 수리 기술을 가르치는 외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수리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특히 그는 청년 실업이 높은 상황에서 수리 기술은 충분한 직업적 가능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전자제품 수리는 단순 노동이 아니라, 창의성과 세심함이 요구되는 기술이에요. 사회가 이 가치를 더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추억을 되살리는 수리의 가치
박씨의 작업실에는 종종 감동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몇 달 전, 한 중년 부부가 방문해 80년대에 결혼선물로 받은 전기다리미를 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원도 들어오지 않던 이 기계를 박씨는 며칠 동안 부품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복원했다. 완전히 되살아난 다리미를 받아든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기계 수리는 마음을 고치는 일이기도 해요"라며 박씨는 웃는다. 그는 이렇게 오래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자신만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지역사회와의 연대
박씨는 자신의 기술이 개인의 만족을 넘어 지역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마을 공방 네트워크와 협력해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을 위한 무상 수리 활동도 벌이고 있다. 오래된 텔레비전이나 선풍기, 전기장판 같은 생활 필수품을 수리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단지 물건을 고치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수리를 통해 공동체의 따뜻함을 전하고자 한다.
디지털 시대의 수리 철학
스마트폰과 최신 가전이 일상화된 지금, 수리보다 교체가 일반화되는 현실에서 박씨는 오히려 아날로그 감성을 지키려 한다. 그는 "수리란 기술이자 철학"이라고 말한다. 불편한 것을 감수하며 오래된 물건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을 최대한 오래 쓰는 것. 이 철학은 환경 보호와도 연결되고, 무엇보다 소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게 한다. 그는 수리를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사물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경험을 나누고 싶어 한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
박씨는 요즘 작업 중간중간 수리 일지를 정리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한 고장 사례, 해결 방법, 주의할 점 등을 기록해 후배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물을 대하는 태도 역시 후배들이 배웠으면 한다고 말한다. "고장 난 기계도,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돼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해봤을 뿐일 수도 있거든요." 그는 오늘도 땜납 냄새 가득한 작업실에서 누군가의 사연이 깃든 전자기기를 조용히 고치고 있다.
시대를 넘어선 기술의 가치
박씨가 수리하는 전자제품 중에는 30년이 넘은 오래된 물건들도 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기만 한 카세트 플레이어나 튜브 라디오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다시 소리를 낸다. 그는 “기술은 시대를 따라가지만, 기술자의 손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전자기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수리에 담긴 정성과 집중력이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생명은 단지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금 추억을 불러낸다.
변화를 위한 작은 제안
박씨는 전자기기 제조사들도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빨리 단종되는 부품이나 수리를 어렵게 만드는 구조는 지속가능한 소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수리 친화적인 디자인과 보증 기간 연장, 부품 공급 확대 같은 제도를 통해 소비자와 기술자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기계를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기술 발전 아닐까요?"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기술자 이상의 철학을 담고 있다.
'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 속 무대 뒤편 – 극장 무대기술 전문가 박정우 씨의 세계 (2) | 2025.08.08 |
---|---|
도시 폐현수막 재활용 작업자 조씨의 하루 – 버려진 천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는 손길 (3) | 2025.08.07 |
도시 신호등 유지보수 기술자 박씨의 하루: 도로 위 안전을 지키는 숨은 수호자 (2) | 2025.08.06 |
도시 전기차 충전소 유지관리 최씨의 하루: 친환경 미래를 뒷받침하는 숨은 노력 (1) | 2025.08.05 |
도시 방음벽 유지보수 기술자 이씨의 하루: 소리 없는 평화를 지키는 사람 (0) | 2025.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