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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수목진료사 한씨의 하루 – 보도블록 아래 뿌리를 읽는 사람

도시의 가로수는 늘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낙엽을 떨군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과 손이 매일 닿아야 한다. 수목진료사는 도시 나무의 의사다. 병해충을 진단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뿌리가 숨 쉬도록 토양을 돌본다. 한도윤(가명) 씨, 49세. 그는 20년 가까이 수도권 곳곳의 가로수와 공원 수목을 돌봐 왔다. “건물도, 도로도, 사람도 나무 그늘 아래서 쉬어요. 그래서 도시에선 나무 한 그루도 ‘시설’이자 ‘이웃’이죠.” 오늘 우리는 한씨의 하루를 따라가, 보도블록 아래 뿌리부터 가지 끝 잎맥까지 살피는 그의 일을 기록한다.

 

도시 보도블록의 가로수 수목진료사

아침, 수목대장을 펼치다

한씨의 하루는 시청 녹지과에서 공유하는 수목대장과 현장 앱을 확인하는 일로 시작된다. 한 그루마다 고유번호, 수종, 흉고직경(DBH), 식재 연도, 최근 전정 이력과 민원 기록이 담겨 있다. 그는 오늘 점검할 구간의 일사량·풍향 지도와 공사 예정 지점, 도로 굴착 허가 정보를 함께 확인한다. “나무 진료는 의학과 토목, 교통이 겹쳐 있어요. 땅속 관로나 공사 계획을 모르면 뿌리 진단이 반쪽이 되죠.” 배낭에는 루페(10배 확대경), 토양경도계, pH·EC 미터, 토양시료 채취관, 수간주사 장비, 수간보호제, 수형 측정용 클리노미터, 그리고 안전장비가 들어간다.

잎맥과 껍질에서 듣는 신호

현장에 도착하면 먼저 관찰부터 한다. 잎의 엽록소 농도와 반점 분포, 잎맥의 변색, 새순의 길이 감소는 병해충이나 영양결핍의 중요한 신호다. 수피(나무껍질)에 생긴 세로 균열, 송진 분비, 흰가루나 검은 그을음은 참나무시들음병, 그을음병, 깍지벌레 등 가능성을 가리킨다. 한씨는 루페로 잎 뒷면을 들여다보고, 의심되는 가지를 절단해 단면 색을 본다. “병은 대체로 변색과 냄새, 수액 점도로 먼저 나타나요. 나무가 내는 ‘비상 신호’를 듣는 셈이죠.” 진단이 끝나면 필요에 따라 선택적 전정이나 수간주사를 계획한다.

뿌리가 숨 쉬는 토양 만들기

도시 나무의 가장 큰 적은 답압(踏壓), 즉 발과 바퀴로 눌린 흙이다. 보도블록 아래 토양은 공극이 줄어들어 산소가 부족해지고, 빗물이 스며들지 못한다. 한씨는 토양경도계로 경도를 측정하고, 깊이별 시료를 채취해 pH·EC(염분)를 점검한다. 염분이 높으면 가로변 제설제 영향, pH가 치우치면 영양 흡수가 막힌다. 그는 에어스포레이드(압축공기 토양개량)로 굳은 흙을 미세하게 풀고, 바이오차·우드칩 멀칭으로 통기성과 보수력을 높인다. “비료를 주기 전에 뿌리가 숨을 쉬게 해야 해요. 숨 못 쉬는 뿌리에 비료는 소금물일 뿐이거든요.”

수형 관리와 안전의 균형

도시의 가지치기는 단순 미용이 아니라 안전관리다. 보행자 동선, 신호등·표지판 시야, 전선 이격거리, 차량 높이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한씨는 CODIT(부패확산차단) 원리에 따라 절단 각도를 잡고, 굵은 가지를 나눠 자르는 3단 절단으로 박리 피해를 줄인다. “잘린 면적이 클수록 나무는 에너지를 상처 치유에 써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만’ 자르는 게 원칙이죠.” 절단면엔 보호제를 과도하게 바르지 않고, 빗물 흐름을 고려한 절단면 정리로 스스로 봉합할 시간을 준다.

이식과 활착, 생사의 기울기

재개발이나 도로 공사로 나무를 이식해야 하는 날이면 긴장이 배가된다. 뿌리분 크기(직경×10~12배), 굴취 시기, 지주목 각도, 와이어 텐션, 수간보호, 관수 주기까지 모든 요소가 활착률을 좌우한다. 한여름 긴급 이식이었던 어느 날, 그는 그늘망·수간 보랭포·습포를 동원해 수분 손실을 최소화했고, 저녁 무렵 첫 잎이 다시 세워지는 순간을 지켜봤다. “이식은 수술과 같아요. 이틀만 관리가 느슨해도 기울어진 생사를 되돌리기 어렵죠.” 활착 1년 차까지는 정기적인 관수·비료·토양개량으로 뿌리 신장을 돕는다.

민원과 교육 사이에서

가로수는 사랑도 민원도 많이 받는다. “낙엽이 지저분하다”, “벌레가 나온다”, “그늘이 집을 가린다” 같은 민원과 “가지치기를 너무 했다”, “새집이 사라졌다”는 항의가 한꺼번에 온다. 한씨는 설명과 설득을 택한다. 낙엽 수거 주기를 조정하고, 깍지벌레에 천적을 도입하는 생물적 방제, 과도 전정을 줄이는 수형 계획을 공유한다. 때로는 나무 이름표를 달고 QR코드로 관리 이력을 공개해 시민이 공동 관리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나무를 아는 순간, 불만이 관심으로 바뀌어요.”

기후위기 시대의 처방

기후변화로 도시는 덥고 건조해졌다. 가로수는 열섬을 완화하지만, 동시에 가뭄·돌발해충·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한씨는 수종을 단일수종 가로수에서 혼합수종·토종 위주로 바꾸고, 가뭄 내성 강한 품종을 시범 식재한다. 스마트 관수 밸브와 토양 수분 센서를 연결해 필요할 때만 물 주기를 실행하고, 극한 폭염기엔 수간백색도료로 줄기 온도를 낮춘다. “이제 가로수는 경관을 넘어서 인프라예요. 전기·수도처럼 관리 체계가 필요합니다.”

안전, 팀워크, 그리고 로프워크

전정 현장은 항상 위험과 맞닿아 있다. 그는 고소작업차 점검, 톱날 보호, 체인쏘 방어복·헬멧·보안경·청력보호구를 착용하고, 전선과의 이격을 재확인한다. 협소한 골목에서는 트리클라이밍(로프워크)으로 상부 접근을 하고, 지상 팀원이 로프를 관리한다. “톱질보다 위험한 건 방심이에요.” 작업 전 JSA(작업위험성평가)를 실시하고, 비상 하강·구조 훈련을 반복한다.

한씨가 꿈꾸는 도시의 숲

한씨의 꿈은 거리마다 다른 얼굴의 숲길이다. 벚·느티가 줄지어 선 단조로움 대신, 계절별·지역별로 특성이 살아난 혼합림 가로수, 보행로에는 뿌리보호판과 투수블록, 빗물을 저장해 가뭄에 쓰는 레인가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도시. 아이들이 나무에 귀를 대고 수액 소리를 듣고, 어르신이 벤치 그늘에서 쉬는 풍경. “나무가 자라듯 도시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빨리보다 오래가 중요합니다.”

퇴근길의 루틴

해가 기울면 그는 오늘의 진료 기록을 정리한다. 사진과 GPS 좌표, 토양 수치, 처방 내역을 서버에 업로드하고, 내일의 민원·전정·토양개량 일정을 묶어 동선 최적화를 한다. 가방 한쪽에 늘 넣어 다니는 작은 루페를 쓰다듬으며, 그는 미소 짓는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 나무는 뿌리로 말해요. 저는 그 말을 번역하는 통역사죠.” 내일도 그는 보도블록 아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나무의 언어를 듣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