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위의 병원, 그 안에서 생명이 이어진다
매일 아침, 붉은 십자가가 붙은 작은 버스가 도심 곳곳에 정차한다.
작은 상가 옆, 학교 운동장 옆, 대기업 주차장 한켠.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 안에서는 매일 수십 명의 생명을 위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
이동식 헌혈버스, 그리고 그 안에서 묵묵히 일하는 간호사들이 있다.
이씨(가명)는 대한적십자사 산하 헌혈버스에서 근무 중인 38세의 간호사다.
그녀는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돌며 하루 평균 40~60명의 헌혈자를 맞이하고,
문진, 혈압·맥박 측정, 채혈, 응급상황 대응, 채혈기 정비, 기록 정리 등
헌혈 전 과정을 총괄하는 책임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작은 버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건 진짜 생명이에요.
우리는 매일, 그 생명의 한 부분을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오늘은 이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좁은 공간, 반복되는 긴장, 그러나 가장 따뜻한 손길이 있는 헌혈버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아침 8시, 멈춰선 버스 안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이씨의 하루는 아침 7시 30분, 헌혈센터 내 회의실에서 일정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날의 출동 장소, 도착 시간, 예상 헌혈자 수, 필요한 장비를 점검한 후
버스 기사와 함께 이동을 시작한다.
보통 도착 시간은 오전 9시.
이씨는 도착하자마자 버스 안 전기 연결, 침대 정리, 채혈기 점검, 혈액백 냉장 상태 확인, 소독 작업 등
하루의 가장 중요한 준비를 빠르게 진행한다.
“차 안이 작아요. 길어야 8평쯤 되죠.
근데 거기에 모든 장비랑 4~5명의 직원, 헌혈자까지 있어야 해요.
그만큼 동선과 소통이 완벽해야 하죠.”
헌혈이 시작되면 헌혈 희망자의 문진 → 혈압·맥박·체온 측정 → 적격 여부 판정 → 채혈 순으로 진행된다.
이씨는 이 모든 절차를 직접 설명하고, 상태를 관찰하며
응급 상황 발생 시엔 즉각 대처해야 한다.
“어지럼증, 혈압 저하, 실신, 구토…
헌혈은 안전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이 가끔 있어요.
그래서 계속 말을 걸고, 표정을 살피는 거예요.”
같은 하루, 그러나 사람마다 다른 마음
이씨가 가장 신경 쓰는 건 헌혈자의 심리다.
그녀는 처음 온 사람, 주저하는 사람, 반복 헌혈자, 단체 신청자까지
매일 수십 명을 만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른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분은 너무 무서워해요. 바늘도 못 봐요.
그럼 시선을 돌리고, 손을 꼭 잡아줘요.
‘끝나면 커피 드릴게요~’ 하면서 웃기라도 하죠.”
반면에 묵묵히 팔을 내미는 사람들,
한마디 말 없이 익숙하게 채혈을 기다리는 정기 헌혈자들 앞에서는
그녀도 말수가 줄어든다.
“그런 분들 앞에선 괜히 더 조심하게 돼요.
의외로 그런 분들이 탈진도 더 잘 와요.”
단체 헌혈이 있는 날엔 업무가 폭주한다.
헌혈 인원이 많아질수록, 이씨의 집중력도 극한으로 치닫는다.
“점심시간엔 거의 못 먹어요.
그냥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음 사람 받아야죠.”
하지만 그 속에서도 기억에 남는 사람은 늘 한 명쯤 생긴다.
“몇 해 전, 고등학생이 처음 헌혈하러 왔어요.
그때 많이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매년 생일마다 헌혈하러 와요.
그 친구가 커가는 걸 내가 보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일이 진짜 오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피 한 봉지에 담긴 책임
헌혈이 끝나면 이씨의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수거한 혈액은 반드시 온도 유지가 된 상태로 보관돼야 하고,
헌혈자의 컨디션 체크, 후속 안내, 부작용 보고까지 모두 진행해야 한다.
“헌혈은 끝났지만, 그분 몸은 내가 끝까지 살펴야 해요.
집 가다가 쓰러지는 일도 있거든요.
그래서 꼭 쉬었다 가라고 말해요.”
그녀는 매일 일지에 누가 언제 어떻게 헌혈했고,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혈액 상태는 어땠는지를 꼼꼼히 기록한다.
그 기록은 혈액 사고를 막는 기초자료이자, 의료인의 양심이다.
때때로 헌혈자의 피에서 간염 항체나 기타 질병 지표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럴 경우엔 신속히 본부에 전달해 추가검사나 병원 안내를 지원해야 한다.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에요.
거기에는 그 사람의 건강, 생활, 심지어 마음까지 담겨 있어요.”
그녀는 헌혈이 줄어드는 계절이 오면
그날 받은 혈액봉투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차에서 눈물이 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한테 지금 딱 한 봉지가 필요한데,
그 한 봉지를 못 채우는 날이 있어요.
그게 가장 속상해요.”
이씨가 바라는 건 누군가의 생명을 기억하는 것
이씨는 이 일을 10년 넘게 해오면서
“나 하나로 바뀌는 세상은 없지만, 한 명이 구해질 수는 있다”는 걸 배웠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버스 안 간호사’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별명 속에 묵묵히 지켜낸 수많은 순간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헌혈하면 쿠폰 생각 먼저 하더라고요.
근데 사실은, 그 피 한 봉지가 사고로 다친 아이를 살리고, 백혈병 환자한테 수혈로 쓰여요.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한번만 생각해봤으면 해요.”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버스 안에서 일할 생각이다.
좁고 덥고 바쁜 공간이지만,
그곳이 세상과 연결된 가장 가까운 창구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움직이고, 피는 흐르고, 사람은 기억해요.
그게 생명을 이어주는 일이에요.”
오늘도 이씨는 채혈기를 닦고, 빈 의자를 정리하고,
누군가의 혈액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착하길 기다린다.
멈춰선 작은 차 안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주는 손.
그게 헌혈버스 간호사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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