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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항만 하역 노동자 정씨의 하루: 거대한 철의 덩어리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

컨테이너 한 개, 그 뒤엔 수십 명의 손이 있다

항구는 항상 분주하다.
거대한 선박이 도크에 접안하고,
수십 미터 위에서 크레인이 움직이며
하늘을 가릴 듯한 컨테이너가 하나 둘 땅에 내려온다.
수출입의 최전선인 이곳에서,
도시의 경제와 물류가 매일 새로 시작된다.

그 복잡하고 위험한 작업 뒤에는
하루 10시간 넘게 땀 흘리는 하역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수만 톤짜리 선박 아래에서 화물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적재하며,
철과 기계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묵묵히 움직인다.

정영철(가명) 씨는 부산항 인근 한 민간 하역업체에서 근무하는 55세의 항만 하역 노동자다.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일한 지 18년 차,
지게차, 로더, 크레인 작업 보조, 수동 하역까지
모든 단계의 하역을 경험해온 베테랑이다.

“우린 눈에 띄지 않아요.
하지만 이 항구가, 이 나라가 움직이게 하는 손이죠.”

오늘은 정씨의 하루를 통해
강철과 땀이 뒤섞인 항만 하역 현장의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항만 하역을 대기하는 거대 선적

새벽 6시, 항구에 울리는 첫 기계음과 함께 시작되는 하루

정씨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한다.
부산항 근처의 하역장에 도착하면,
아직 해가 뜨기도 전, 항만은 이미 컨테이너와 중장비로 가득 차 있다.
그의 하루는 작업 배정표를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작업복, 안전모, 귀마개, 스틸캡 안전화, 무전기, 반사조끼.
“컨테이너 하나가 떨어지면 그냥 죽는 거예요.
여긴 언제나 위험이랑 붙어 있어요.”

그가 맡은 구역은 벌크 화물 하역 구간.
이곳은 곡물, 철광석, 화학 비료 등 포장되지 않은 화물을
대형 크레인이나 로더로 하역하는 고위험 구간이다.

하루에 하역되는 양은 평균 1,000톤 이상.
그 속에서 그는 지게차로 화물을 옮기고, 작업자들과 무전으로 소통하며,
때로는 직접 삽으로 남은 잔여물을 처리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몸 전체가 먼지로 덮여요.
코에서 검은 가루가 나올 때도 있어요.”

위험은 상시 대기 중, 안전은 철저히 몸으로 배운다

항만 하역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작업이다.
무게 수 톤의 컨테이너가 위에서 내려오고,
수많은 중장비가 바쁘게 오가는 공간 속에서
작업자의 작은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정씨는 3년 전, 지게차에 깔릴 뻔한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후진하던 지게차가 내 쪽으로 오는 걸 못 봤어요.
무전이 안 들렸고, 운전자는 시야가 가려졌고…
진짜 몇 초 차이로 살아났어요.”

그 일 이후로 그는 항상 장비 반경 5미터 이상 거리 유지를 철칙으로 삼았다.
또한 신호수와 무전으로 최소 5회 이상 교신하고 나서만 장비를 움직이도록 팀을 설득했다.

“사람 목숨은 한 번이잖아요.
내가 조심해서 하루라도 무사히 끝내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그는 또 다른 어려움으로 작업 강도의 불균형을 꼽는다.
항만 하역은 일이 몰릴 땐 12시간 넘는 초과 근무,
비가 오거나 선박 일정이 밀리면 하루 종일 대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계약직이라 무급 대기도 많아요.
기다리는 것도 노동인데, 그건 아무도 인정 안 해요.”

누군가는 이 강철 위를 걷고, 누군가는 그걸 움직인다

정씨는 자신이 맡은 일을 도시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한 조각이라 여긴다.
“내가 내리는 이 컨테이너 안에
어디론가 가야 할 상품, 부품, 곡물, 식자재가 있어요.
그게 없으면 마트도, 공장도, 식탁도 멈춰요.”

그는 종종 하역된 컨테이너 위에 서서 항구를 바라보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기계 아래에 있던 자신이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항만은 도시의 뿌리에요.
화려하지 않지만, 뿌리가 썩으면 나무도 못 자라잖아요.”

정씨는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옷에 기름 냄새 나고, 몸은 늘 검고…
아들이 아빠 뭐 하냐고 물을 때 그냥 ‘회사 다녀’라고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내가 먼저 알아야 남도 알아주죠.”

그는 오늘도 크레인 소음과 경적음 속에서
무전기를 들고, 컨테이너의 무게를 몸으로 받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정씨가 바라는 건 묵묵한 손에 대한 작은 존중

정씨는 이 일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처우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낮다고 말한다.

“항만 하면 다들 수출만 생각하죠.
근데 수출이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바닥에서 그걸 옮겨줘야 해요.”

그는 야간 수당 미지급, 계약직 고용 불안정, 작업 강도에 비해 낮은 보상 등을 겪으며
수차례 퇴직을 고민했지만,
“이 일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항만에 남아 있다.

그가 바라는 건 크지 않다.
한 사람이라도 항만 하역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일’임을 알아주는 것.
그리고 안전하게 퇴근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보장되는 것.

“우리가 옮긴 철박스 안에
누군가의 일상, 가족, 생활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정씨는 땀에 젖은 손으로
작업 장갑을 다시 끼고 컨테이너 사이를 걸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기초를,
몸으로 지탱하는 사람.

그게 항만 하역 노동자 정씨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