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이 아니라, 기억의 시작을 지키는 자리
도시 외곽의 한적한 언덕,
잔잔한 바람과 정숙한 기운이 감도는 건물.
그곳은 생이 끝난 이들의 이름이 머무는 공간, 시립 납골당이다.
거대한 벽면엔 작은 위패와 사진, 봉안함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엔 매일같이 그곳을 정돈하고, 지키는 한 사람이 있다.
조현수(가명) 씨, 61세.
서울 근교 시립 봉안당에서 봉안함 관리 및 유가족 응대, 시설 청결, 제례 공간 운영을 담당하는
납골당 관리인이다.
그는 12년 동안 수만 명의 마지막 주소를 지켜왔다.
“여기 있는 분들은 죽었지만,
누군가에겐 여전히 아버지고, 딸이고, 친구죠.
내 일은 그 기억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오늘은 조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죽음의 곁에 있지만, 삶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아침 7시 30분, 조용한 봉안실에 불을 켜다
조씨의 하루는 늘 조용하게 시작된다.
이른 아침, 납골당 문을 열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봉안실 전등을 켜고, 제단을 정돈하는 일이다.
“밤새 먼지가 앉은 사진을 닦고, 국화꽃을 새로 갈아요.
누구는 오늘 와서 인사할지도 모르니까요.”
건물 안은 사람 목소리보다 발걸음 소리와 종이 흔들리는 소리가 더 자주 들린다.
그는 봉안함 하나하나의 이상 여부를 눈으로 확인한다.
누가 손을 댔는지, 비문이 흐릿해지진 않았는지, 사진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여긴 무덤이 아니에요.
기억의 도서관 같은 곳이에요.
책처럼 조심히 다뤄야 하죠.”
조씨가 관리하는 봉안함은 약 1만 개 이상.
그는 매달 각 봉안함의 상태를 기록하는 전자 관리 시스템을 활용해
관리기간 도래 알림, 이장 여부, 유족 연락처 확인 등을 한다.
“특히 오래된 위패는 유족 연락처가 바뀌어서 못 찾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마음이 참 복잡하죠.
이름만 남은 채 시간이 멈춘 기분이에요.”
조용한 공간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이야기
조씨는 유족을 응대하는 시간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순간이라 말한다.
“와서 울고 가시는 분도 있고,
말없이 오래 서 있다 가시는 분도 있어요.
그땐 내가 말을 많이 안 해요.
그냥 조용히 곁에 있어주기만 해요.”
명절이나 기일엔 하루에 수백 명이 봉안당을 찾는다.
그는 안내와 동선 정리,
향초 및 제물 안전 확인, 쓰레기 처리까지 혼자서 도맡는다.
“특히 노부모를 모신 딸들이
먼 곳에서 기도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
괜히 나도 숙연해져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이보다 더 외로워 보이거든요.”
봉안함은 작고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조씨는 가끔 유족이 두고 간 편지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사람의 인생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누가 뭘 남겼는지 다 기억나요.
누군가는 손편지, 누군가는 아기 신발,
누군가는 커피 한 잔이었어요.
그게 참… 마음에 오래 남더라고요.”
납골당은 죽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많은 이들이 납골당을 ‘차가운 공간’, ‘죽음을 상징하는 장소’로만 생각하지만
조씨는 다르게 말한다.
“여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오는 곳이에요.
여기서 웃는 분도 많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분도 있어요.”
그는 납골당의 의미를 ‘시간이 멈춘 장소’가 아니라
‘기억을 이어가는 장소’라고 표현한다.
“누가 오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그분에겐 안심이 돼야 해요.
그래서 항상 청소도, 관리도, 인사도 빠뜨리지 않죠.”
그는 3년 전, 유족 없이 홀로 봉안된 고인의 생일에
작은 국화 한 송이를 올린 적이 있다.
그게 소문이 나 유족이 나중에 찾아와 “감사하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나는 별거 안 했어요.
그냥 외롭지 않았으면 해서 꽃 하나 놓았을 뿐이에요.”
조씨가 바라는 건, 이름이 잊히지 않는 세상
조씨는 자신의 일이 “눈에 띄진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납골당이
마지막으로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죽으면 끝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몇 년이라도 더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주는 게
내 일이니까요.”
조씨는 오늘도 봉안실을 한 바퀴 돌며
위패를 정리하고 사진을 닦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고요한 벽 앞에 서서
그 이름들을 지켜보는 사람.
그가 지키는 건 단순한 유골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기억, 사랑이다.
그게 납골당 관리인 조씨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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