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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비상발전기 정비기사 박씨의 하루: 전기가 끊긴 순간을 대비하는 사람

불이 꺼진 순간, 그때 누군가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불이 켜진 공간에서 살아간다.
전등, 엘리베이터, 냉장고, 인터넷, 자동문, 감시장비.
이 모든 것은 ‘전기’라는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작동한다.
하지만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전기는 곧 생명이라는 것을.

정전은 생각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
번개, 전선 단선, 노후 설비, 과부하, 누전, 지진, 화재 등
한순간의 사고가 병원을 멈추고, 관제센터를 끊고, 공항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비상발전기(Backup Generator)다.
그리고 그 발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매일 점검하고 돌보는 사람들,
그중 한 명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박재민(가명) 씨, 45세.
서울 서남권 전력안전관리업체에서 근무 중인 비상발전기 정비기사로,
주로 대형 건물, 병원, 데이터센터의 발전기 정기 점검과 긴급 출동을 담당한다.

“비상발전기는 잘 안 쓰는 장비죠.
근데 안 쓸수록 더 완벽해야 해요.
언제든지 단 한 번, 단 몇 초 안에 켜져야 하니까요.”

오늘은 박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전력 시스템을 지키는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아침 7시 40분, 오늘 점검할 ‘조용한 비상장치’ 목록을 확인한다

박씨의 하루는 매일 다르다.
그가 소속된 업체는 서울 시내 80여 곳의 발전기 설비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며,
한 달에도 수십 건의 응급 출동 요청을 받는다.
이날 그의 첫 일정은 한 대학병원 옥상에 설치된 디젤식 비상발전기 점검이다.

“보통 병원, 공항, 금융센터, 연구소, 방송국 같은 데는
비상발전기가 2~3대 이상씩 있어요.
전원이 끊기면 바로 자동으로 전환되게 돼 있죠.”

발전기실은 대부분 옥상이나 지하 깊숙한 기계실에 있다.
소음과 진동, 디젤 냄새가 강해서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꺼리는 공간.
박씨는 오늘도 작업복, 귀마개, 방진마스크, 절연 장갑, 휴대 진단장비를 챙겨 계단을 오른다.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연료 상태와 배터리 전압 확인.
“디젤 발전기는 연료탱크 안 기름이 오래되면 슬러지 생기고
배터리 방전되면 시동도 안 걸려요.”

다음은 냉각수, 윤활유, 벨트 장력, 배기구 이물질 확인.
그리고 발전기 작동 테스트를 위해 메인 전원 차단 후 자동 시동 상태를 점검한다.

“정말 시동이 안 걸리면 그 건물은 몇 초 동안 전기 완전히 끊겨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특히 병원이나 수술실 같은 데선 말도 못 해요.”

정전을 대비한 비상발전을 할 수 있는 전기실 모습

‘작동 안 되면 사고’인 장비를 매일 ‘쓸 일 없게’ 만드는 일

비상발전기는 그 자체로 역설적인 존재다.
‘쓸 일이 없을수록 좋은 장비’지만,
막상 필요할 땐 반드시 작동해야 하는 장비.

그래서 박씨의 일은 늘 완벽을 요구받는다.
그는 점검 후에도 발전기 작동 테스트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배전반 전환 속도, 부하전류 흐름, 과열 상태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비상발전기는 단순히 엔진만 도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 전력시스템과 연동돼야 해요.
한 군데라도 신호 안 맞으면 정전되고, 고장 나요.”

그는 실제로 한 방송국에서 주간 뉴스 방송 도중 발전기 연동 오류로
5초 정전이 발생했던 상황
을 점검한 경험이 있다.
“그 5초 때문에 생방송이 끊기고, 광고 손해가 수천만 원이었죠.
그 이후엔 테스트를 하루 두 번씩 했어요.”

비상발전기는 구조상 한 달에 한 번 이상
실 부하 가동 테스트를 해야 하지만,
비용 절감과 인력 부족으로 테스트를 미루는 곳도 많다.

“그런 데 갈 땐 더 긴장돼요.
1년 내내 안 켜다가, 실제 정전이 오면…
그때 안 되면 진짜 문제잖아요.”

박씨는 늘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쓸 일이 생기면 1초도 늦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
을 안고 일한다.

정전은 밤에 오고, 출동은 언제든지 온다

비상발전기는 대부분 야간, 악천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정전이 발생할 때 출동을 요구받는다.
박씨는 매달 평균 5회 이상의 심야 긴급 출동을 한다.
“비 오는 날 벼락 맞아서 전원 나가면
가장 먼저 발전기가 돌아가야 하잖아요.
근데 돌아가질 않으면? 그땐 우리가 직접 뛰어가야죠.”

어느 날 밤 11시, 서울 시내 한 대형 산부인과에서 발전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고가 왔다.
박씨는 40분 만에 도착했고, 확인 결과 배터리 충전장치 고장으로 시동이 안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 병원 수술실, 인큐베이터, 의료장비 다 꺼질 수도 있었어요.
땀 뻘뻘 흘리면서 응급 배터리 교체하고 7분 만에 시동 걸었죠.”

그날 병원장은 박씨에게 “당신이 오늘 몇 생명을 살렸다”며 악수를 건넸고,
그는 처음으로 이 일이 단순한 정비가 아니라
‘전기 뒤에서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우린 전기를 만지지만,
사실은 사람을 지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박씨가 바라는 건 ‘불 꺼지기 전에 준비하는 문화’

박씨는 여전히 많은 현장에서 비상발전기를 ‘있는 척만 하는 장비’로 취급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장비는 비싸고, 테스트는 귀찮고,
그러다 정전 나면 무조건 ‘왜 안 되냐’고 해요.”

그는 이 일을 17년 넘게 해오면서
진짜 중요한 건 기술보다 ‘예방’이라고 느낀다.

“정전은 아무 때나 오고,
발전기는 한 번에 실패하면 끝이에요.
우리가 미리 봐두는 건 결국 사람을 위한 거죠.”

그는 매년 8월, 태풍과 집중호우가 몰려올 때면
점검 항목을 두 배로 늘려서라도 현장을 방문한다.
“누가 나한테 고맙다고 안 해도 괜찮아요.
그날 아무 사고 없이 넘어가면, 그게 보람이죠.”

박씨는 오늘도 발전기실 안에서
조용히 윤활유 냄새와 기계 소음에 둘러싸인 채
스위치를 누르고 엔진 소리를 듣는다.

전기가 끊기기 전에 움직이는 사람,
가장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도시의 심장을 지키는 손.

그게 비상발전기 정비기사 박씨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