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그 순간, 이미 누군가가 일하고 있다
수돗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흘러나온다.
세수를 하거나, 밥을 지을 때, 설거지를 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우리는 단 한 번도 ‘물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도착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흐름 뒤에는
도시 지하 수십 미터 아래, 거미줄처럼 얽힌 송수관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땅속에서 수도관을 점검하고, 균열을 찾고, 낡은 배관을 교체하며
도시의 혈관이라 불리는 물길을 지켜낸다.
이인규(가명) 씨는 서울시 수도사업본부 위탁관리업체에 소속된 지하 송수관 점검원으로 12년째 근무 중이다.
그는 주로 밤 시간대와 물 사용량이 적은 새벽 시간대에 도심 지하로 들어가
관로 상태 점검, 누수 탐지, 밸브 정비, 수압 측정, 긴급 복구작업 등을 맡는다.
“사람들은 수도꼭지를 트는 순간 물이 나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죠.
근데 그게 당연하지 않게 만들려고, 우린 매일 지하에서 일해요.”
오늘은 이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도시의 흐름을 지켜주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손길의 세계를 함께 들여다본다.
밤 10시, 도로 아래로 내려가는 첫 발걸음
이씨의 근무는 대부분 밤이다.
수도관 점검은 도로를 파거나 밸브를 여는 작업이 포함되기 때문에
시민 통행이 적은 야간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밤 9시 반, 장비 차량과 함께 지정 지점에 도착한다.
점검 위치는 서울 동북부의 한 대로변.
관로 위치는 GPS로 확인되지만, 표면에 보이는 건 맨홀 뚜껑 하나뿐이다.
“지하로 들어가면 깜깜해요.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고, 온몸이 습기랑 기름에 젖어요.”
작업복, 안전모, 방진 마스크, 손전등, 산소 측정기, 통신 장비를 챙긴 뒤
지름 80cm의 맨홀을 열고 10미터 아래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아래는 직경 1.5~2m짜리 원형 콘크리트 통로.
곳곳엔 유증기, 이물질, 이끼, 곰팡이, 그리고 때때로 쥐가 보인다.
“위험하냐고요?
네, 늘 위험해요.
하지만 누군가 안 하면 도시가 마비돼요.”
그는 송수관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며 이상음 유무 확인,
전기식 누수 탐지기로 관 내 진동 분석,
수압 센서를 연결해 이상 유무를 기록한다.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작은 균열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송수관 점검은 단순히 금이 갔는지를 보는 게 아니다.
물의 흐름과 압력, 배관의 떨림, 온도, 습도, 기울기까지 전부 읽어야 한다.
작은 이상이 큰 누수로 이어지고,
누수가 폭발로 이어지면 인도와 도로가 붕괴되기도 한다.
“작년에도 강남 한복판에서 송수관 파열로
도로 전체가 침수된 적 있었어요.
사람들은 비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노후 배관 때문이었죠.”
그는 점검 중간에도 무전을 통해 지상 팀과 소통한다.
만약 가스 농도가 높아지면 바로 대피해야 한다.
사다리 통로가 좁기 때문에 한 번에 1명씩만 오르내릴 수 있어,
안전관리가 중요하다.
“가끔 안에서 통신이 끊기면
지상팀이 몇 분 안에 연락 없을 경우 구조하러 들어옵니다.”
한 번은 송수관 내부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은 동료를 발견해
자신이 직접 끌어올린 적도 있다.
“그땐 진짜 두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사람이 숨 못 쉬면 몇 분도 못 버텨요.
그래서 항상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 세 번 하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물은 흐르고 사람은 잊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
이씨는 지하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고 말한다.
“지하철도 터지고, 상수도도 끊기고, 갑자기 아파트 물 안 나올 때
사람들은 그제야 ‘누가 고치겠지’ 하잖아요.
그 누가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는 그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은 외로운 일이라고 덧붙인다.
“밤에 일하고, 낮엔 자고,
가족들이랑도 시간이 안 맞아요.
명절에도 긴급 복구가 있으면 나가야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사람들이 물을 믿잖아요.
그 믿음을 깨지 않게 하는 게 내 일이니까요.”
그는 언젠가 딸이 학교 과제로
‘아빠의 직업을 소개하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우리 아빠는 도시 밑에서 물을 지켜요’라고 썼다는 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내가 꼭 보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물은, 반드시 보여야 하니까요.”
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러나 삶은 지상에 있다
이씨는 자신이 “도시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자부심과 함께,
가끔은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도 받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위에서만 살잖아요.
근데 나는 지하에서 하루를 보내니까,
어떤 날은 진짜 세상 밖에 있는 사람 같아요.”
그는 하루 평균 4~5시간 이상을 땅 밑에서 보낸다.
퇴근 후에는 햇빛을 보기 위해 일부러 공원을 산책하거나,
마음이 답답한 날엔 일기를 써서 감정을 풀기도 한다.
“나는 땅속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가끔 세상이 너무 밝으면 좀 낯설 때도 있어요.
그래서 조용한 게 좋아요.”
그의 아내는 늘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들어와서,
남들이 일어날 때 자는 사람”이라며 걱정했지만,
이씨는 웃으며 말한다.
“누군가는 낮에 도시를 지키고,
나는 밤에 도시를 흐르게 하니까 괜찮아요.”
그는 이 일을 하며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노동이 세상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이 흘러야 도시가 돌아가잖아요.
그 흐름을 내가 만들고 있다는 게,
이 힘든 일도 견디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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