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증기 가득한 공간의 온도는 누가 맞추는가
몸을 씻고, 땀을 흘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사람들은 대중목욕탕을 찾는다.
뜨거운 물과 증기, 차가운 냉탕, 뽀얀 욕실 타일 위로
사람들의 하루가 녹아들고 흘러간다.
그러나 그 따뜻한 공간을 가장 먼저 열고, 가장 늦게 닫는 사람은
욕탕 한쪽, 보이지 않는 문 안쪽 탕비실에 있다.
윤호길(가명) 씨, 59세.
서울 중부 지역의 한 시립 공공목욕탕에서
탕비실 온수 시스템, 소독시설, 배수 상태, 보일러 운영, 락스 희석, 수온 유지, 기계 점검 등을 담당하는
탕비실 관리인으로 10년째 근무 중이다.
“사람들은 그냥 물이 나오는 줄 알아요.
근데 그 온도를 맞추려면 몇 시간 전부터 움직여야 해요.”
오늘은 윤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뜨거운 수증기와 배관 뒤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새벽 4시 50분, 하루를 끓이기 시작하는 시간
윤씨의 하루는 목욕탕이 문을 열기도 한참 전인 새벽 5시에 시작된다.
목욕탕 운영 시간은 오전 6시부터지만,
그는 최소 1시간 전부터 탕비실 보일러를 가동하고,
온도와 압력을 천천히 올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꺼번에 가열하면 파이프 터져요.
수조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깨질 수 있어요.
그래서 천천히, 단계적으로 데워야 해요.”
탕비실에는 온수탱크, 보일러 3대, 열교환기, 배관 밸브,
약품 소독통, 염소농도계, 응급차단 장치 등이 갖춰져 있다.
윤씨는 순서대로 점검한다.
- 온수탱크 수위 체크
- 연소 압력 확인
- 가스 누출 경보기 작동 확인
- 각 탕 수온계 가동
- 비상경보 테스트
- 염소소독제 투입량 조절
그는 ‘물이 데워지는 게 아니라, 공간을 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욕탕에선 수온뿐 아니라
벽, 바닥, 벤치, 손잡이까지 따뜻해야
사람들이 온기를 느껴요.
그걸 전부 내가 준비하는 거죠.”
물은 맑지만, 설비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목욕탕은 청결이 생명이다.
그러나 수증기, 체온, 세제, 땀, 오염물, 수건 등이 뒤섞인 공간을 유지하려면
기계설비만큼 사람의 눈과 손이 필요하다.
윤씨는 매일 아침 8시까지는
1차 점검을 마치고 욕조 수면 높이, 소독 잔류농도, 배수구 막힘 여부, 스팀 발생기 상태를 확인한다.
“염소가 너무 높으면 피부 따갑고,
적으면 세균 못 잡아요.
그 균형을 맞추는 게 내 감각이에요.”
특히 여름철은 곰팡이와 수질 악화가 잦고,
겨울철은 온수 배관 결빙 위험이 크다.
그는 3년 전, 한겨울에 온탕 보일러 밸브가 얼어붙는 사고를 겪었다.
그때는 휴일 아침, 이용객 수백 명이 몰린 상황에서 온탕이 식어버려,
혼자 밸브 해동하고 응급대체 배관을 설치해 대응했다고 한다.
“그때 땀이 아니라 김이 몸에서 나더라고요.
겨울인데 땀에 젖었어요.”
그는 매일 목욕탕 안과 밖을 수시로 오가며,
화장실 환풍기, 샤워기 수압, 비누통 리필, 고무패드 교체, 유리 미스트 제거까지 처리한다.
“내 일은 온도만 지키는 게 아니라,
공간 전체를 균형 잡히게 만드는 거예요.”
이용객은 지나가지만, 나는 하루 종일 머무른다
탕비실은 하루 종일 소음과 습기에 노출된 공간이다.
보일러의 낮은 진동, 스팀 발생기의 규칙적인 소리,
물이 흐르는 관의 ‘두둑’ 소리는 윤씨에게는 일상의 배경음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들어와서 1~2시간 있다 나가죠.
근데 나는 하루 10시간 동안 그 속에서 있어요.”
그는 점심 시간 이후 가장 바쁘다.
이용객이 몰리는 시간대의 수온 체크,
장시간 사용된 스팀실의 환기 상태 점검,
배수펌프 상태 확인, 물 교체 일정 조정 등을 동시에 진행한다.
“탕 안에 들어가는 물은 똑같지만,
그 물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는 특히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의자, 등받이, 탈의실 바닥을 꼼꼼히 관리한다.
“노인분들은 미끄러지기 쉬우니까
고무매트 상태나 물기 유무를 항상 봐야 해요.”
하루가 끝날 무렵, 그는 저수조를 천천히 비우고
잔류온도를 조절한 뒤 보일러를 단계적으로 끈다.
그리고 배수구 청소, 환기 시스템 종료, 약품 보관실 잠금까지
모두 확인해야 퇴근이 가능하다.
윤씨가 바라는 건, 온도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회
윤씨는 자신이 기계만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온기를 유지하는 사람이에요.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욕탕 안에서
피곤을 씻고, 대화를 나누고, 치유를 얻어가는 걸 지켜보며
자신의 일이 ‘사람을 위한 기술’이라는 걸 실감한다고 한다.
“아저씨들끼리 앉아서 등 밀어주는 모습,
손자랑 온 할아버지,
혼자 조용히 땀 빼고 가는 젊은 사람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이 공간의 이유예요.”
그가 바라는 건,
“공공시설을 아껴주는 태도”와 “탕비실도 누군가의 손으로 움직인다는 인식”이다.
“욕탕 온도에 불만 있는 분들이
막 항의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그냥 웃고 넘겨요.
내가 했다는 걸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만,
내가 안 했으면 알게 되니까요.”
오늘도 윤씨는 조용히 가스 계기판을 확인하고,
내일을 위한 수온을 미리 설정한다.
따뜻한 공간은 절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공공목욕탕 탕비실 관리인 윤씨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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