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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아동센터 조리사 김씨의 하루: 아이들의 밥을 짓는 손

누군가의 하루는 밥 한 그릇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밥을 ‘그저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 밥은 안정이고, 위로고, 힘이 되는 시간이다.
특히 집에서 제대로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학교 밖에서 제공되는 따뜻한 한 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기회가 된다.

김명자(가명) 씨, 61세.
경기도의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방과후 급식 조리와 배식, 식자재 관리, 알레르기 확인, 잔반 정리, 조리실 위생까지
전부 혼자 책임지는 조리사로 8년째 근무하고 있다.

“나는 요리사가 아니에요.
그냥 이 아이들이 밥 굶지 않게 도와주는 사람이에요.”

오늘은 김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아이들이 웃으며 밥을 먹기 위해 묵묵히 하루를 준비하는 손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오전 9시, 하루의 장보기는 조용한 전쟁처럼 시작된다

김씨의 하루는 마트가 문 열기 전, 오늘 먹일 메뉴를 머릿속에 그리며 시작된다.
식자재는 대부분 센터 운영비와 지방정부 지원비로 구성된 한정 예산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신선한 재료를 사면서도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 게 제일 힘들어요.”

그녀는 매일 아침 1인 1식 기준 1,800원 안팎의 예산으로 30명분 식단을 짠다.
그 안에 단백질, 채소, 탄수화물, 국물, 후식까지 담아야 한다.
“메뉴가 너무 평범하면 아이들이 안 먹고,
또 너무 낯설면 남기니까 중간을 맞추는 게 어렵죠.”

장을 다 보고 나면 조리실로 돌아와 손질부터 시작한다.
양파, 당근, 애호박, 닭가슴살, 두부, 김치…
그날그날 재료에 따라 아이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조리를 한다.
“누구는 당근 안 좋아하고,
누구는 두부만 집어서 먹고…
그거 다 기억해야 해요.”

조리는 보통 11시 전까지 마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알레르기 확인.
김씨는 아이들 알러지 정보를 손글씨로 적은 노트를 항상 옆에 둔다.
“달걀, 우유, 견과류 있는 날은 조심해야 해요.
간장도 브랜드 바뀌면 성분 확인부터 해요.”

밥 한그릇으로 시작하는 아이들의 식판

아이들의 식판 위에는 조리사의 기억이 담긴다

점심이 다가오면 조리실은 분주해진다.
김씨는 아이들 식판을 미리 정렬하고
편식 심한 아이는 국부터, 식욕 좋은 아이는 밥 양 넉넉히,
조용한 아이는 먼저 눈을 마주치며 한마디 건넨다.

“누구는 밥을 남기면서도
‘선생님, 맛있었어요’ 하고 가요.
그 말이 하루 피로를 다 씻겨줘요.”

그녀는 모든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다.
숟가락이 안 움직이는 아이,
밥만 먹고 반찬을 손대지 않는 아이,
무표정한 채 앉아 있는 아이.

“그럴 땐 식사 끝나고 따로 간식이라도 챙겨줘요.
그날 기분이 어떤지 조심스레 물어보죠.”

조리실과 식당은 바로 연결돼 있어서
식판을 치우는 소리, 아이들 웃음, 조용한 한숨까지 다 들린다.
김씨는 조리사의 역할을
“아이들 하루 상태를 제일 먼저 눈치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점심이 끝나면 곧바로 설거지, 식기 소독, 잔반 처리, 바닥 물청소.
이 과정을 다 마치면 오후 2시가 훌쩍 넘는다.

한 끼가 만든 관계, 그 관계가 만드는 신뢰

김씨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밥을 매개로 쌓이는 조용한 유대”라고 표현한다.

처음엔 인사도 안 하던 아이가,
몇 달 뒤 “오늘 반찬 뭐예요?” 하고 묻기 시작하고,
1년 뒤엔 “선생님, 저 내일 뭐 좋아하는지 아시죠?”라며 웃는다.

“그 말 들으면 속으로는 뭉클해요.
아, 내가 밥만 해주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죠.”

그녀는 매달 한 번씩 있는 급식 만족도 설문조사에 쓰인
“밥이 제일 좋았어요”라는 한 줄에 기운을 얻고,

누군가가 직접 쓴 손편지를 책상에 끼워놓고 간 날은 하루 종일 미소를 짓는다.

“가끔은 내가 아이들보다 더 외로울 때도 있는데,
그런 날엔 아이들 말 한마디가 힘이 돼요.”

조리사는 비공식적인 상담자다.
“오늘 왜 늦었니?”
“밥 안 먹는 이유가 있니?” 같은 질문을 매일 건네며,
아이들의 마음을 가장 먼저 듣는 역할을 한다.

김씨가 바라는 건, 밥을 존중하는 사회

김씨는 조리실에서 하루를 보내며
“밥을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도구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밥상을 뒤로하고 가버릴 때,
그릇을 그냥 놔두고 갈 때
그저 조금만 더 조심해줬으면 해요.
그게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이에요.”

그녀는 식단을 짤 때마다 고민한다.
예산은 늘 빠듯하고, 시간은 부족하지만
“오늘도 아이들이 따뜻하게 먹고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틴다.

퇴근 직전엔 다음 날 식단을 점검하고,
냉장고 온도 체크, 유통기한 확인, 비상 식자재 기록
까지 정리한다.
그리고 조리실을 다시 깨끗이 닦은 뒤 문을 닫는다.

“내일도 누군가 이 밥을 기다릴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내일 또 이 칼과 도마를 잡을 거예요.”

오늘도 김씨는 조용히 가스 밸브를 잠그고
식기건조대 위 마지막 수저를 내려놓는다.

아무도 모르게 준비된 한 끼.
그 안에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

그게 아동센터 조리사 김씨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