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리 손에 닿기까지, 누군가 그 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누군가는 도서관을 ‘책을 찾는 곳’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조용한 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리사서 김수진 씨에게 도서관은 조금 다르다.
그녀에게 도서관은 책이 머물 자리를 설계하는 곳,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돕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다.
김수진(가명) 씨는 서울시립 ○○도서관에서 11년째 정리사서로 근무 중이다.
대출 창구에서 책을 건네는 일도, 추천 도서를 고르는 일도 그녀의 일이 아니다.
대신 그녀는 책이 도서관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서가에 놓이기까지의 모든 흐름을 손으로 직접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꺼내는 것’만 기억하죠.
하지만 그 책이 ‘그 자리에 놓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 저예요.”
오전 8시 50분, 누구보다 먼저 책을 만지는 시간
김씨는 도서관이 문을 열기도 전, 정리실 불을 켜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도착하는 신간 택배 박스부터 확인한다.
그날은 출판사에서 보낸 신간 도서 68권이 정리실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게 다 오늘 내 작업량이에요.
물론 내일 또 새로 오겠죠.”
그녀는 박스를 하나씩 열고, 한 권씩 꺼내며 확인한다.
출판 연도, ISBN, 쪽수, 책 크기, 출판사, 저자 이름, 주제어.
단 하나도 빠짐없이 검토해 시스템에 입력해야 한다.
“도서관 책은 ‘정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데이터’이기도 해요.
이 책이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지를 코드로 정리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도서관 통합시스템에 서지 정보를 입력하고,
한국십진분류법(KDC)에 따라 분류번호를 부여한다.
문학은 800, 사회과학은 300, 역사와 지리는 900, 철학은 100.
아이들 책은 000부터 시작된다.
책에 들어갈 데이터는 MARC 포맷으로 작성된다.
제목, 저자, 출판사, 발행연도, 주제어, 형태사항 등
모두 정확한 포맷과 기호, 규칙에 따라 작성된다.
“한 칸만 틀려도 검색이 안 돼요.
사람들이 못 찾는 책이 되는 거죠.
책은 있는데, 정보가 없으면 사라진 거예요.”
책은 한 줄로 서기까지 복잡한 길을 지난다
서지 작업이 끝나면 물리적인 정리가 시작된다.
김씨는 라벨 프린터로 청구기호를 출력하고,
바코드 스티커를 부착하고, RFID 칩을 붙인다.
“스티커 위치도 중요해요.
다음에 반납할 때 기계에 잘 읽혀야 하거든요.”
RFID 태그는 도난 방지와 자동 반납에 꼭 필요한 장치다.
소형 칩이 책 표지 안쪽에 깔끔하게 붙어야 한다.
두껍거나 얇은 책은 각각 위치를 조정해야 한다.
부착이 끝난 뒤에는 스캔 테스트도 진행한다.
“책은 조용하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존재예요.”
그녀는 책을 정리하다 보면
어떤 책은 너무 오래된 느낌이 들어 코팅지를 덧대기도 하고,
어떤 책은 아동용이지만 내용이 성인서에 가깝다고 판단해
직접 주제 분류를 바꾸기도 한다.
“책이 무조건 정해진 분류대로만 갈 수는 없어요.
도서관마다, 지역마다 이용자 특성이 달라요.
책의 내용뿐 아니라 ‘누가 읽을 책인지’도 중요해요.”
정리사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의 디자이너다
오후가 되면 김씨는 트롤리에 정리된 책을 담는다.
열람실 사서에게 배치를 요청하거나,
직접 서가로 이동해 책을 꽂기도 한다.
“책을 꽂는 건 단순히 넣는 게 아니에요.
비슷한 제목이 연이어 나오면 읽는 사람이 헷갈려요.
그런 것도 다 고려해서 순서를 맞춰요.”
정리사서는 책의 흐름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가령 한 이용자가 ‘아동 심리’를 검색했을 때
연관 주제인 부모 교육, 학교폭력, 감정코칭이 자연스럽게 옆에 배치되도록 조정한다.
“책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책이 옆에 있는지를 보면
그 공간의 철학이 보여요.”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아이들이 책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모습이다.
특히 스스로 책을 정리된 자리에서 뽑아보고,
반납할 때도 정확한 자리에 두고 갈 때.
그럴 때 그녀는 속으로 작게 웃는다.
“책을 정리한 보람이 바로 그런 데서 와요.”
김씨가 바라는 건, 책뿐 아니라 그 ‘자리’의 가치가 기억되길
김씨는 “정리사서는 도서관에서 제일 조용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용자와 직접 대면할 일도 거의 없고,
대부분은 컴퓨터 앞에서 코드를 입력하거나, 책 위에 스티커를 붙이는 반복 작업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정보 흐름과,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디테일이 숨어 있다.
“책은 도서관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정리되고 있어요.
신간도 들어오고, 누군가는 반납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리고…
그 흐름을 놓치면, 도서관은 금방 혼란스러워져요.”
그녀는 때때로 책이 엉뚱한 자리에 꽂혀 있거나,
라벨이 훼손돼 있는 걸 보면 속이 상한다.
“책만 아끼는 게 아니라, 책이 있는 자리를 아껴줬으면 좋겠어요.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오늘도 김씨는
청구기호가 살짝 어긋난 스티커를 다시 붙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서가에 들어갈 마지막 3권을 정리하며, 다음 날 도착할 박스를 생각한다.
책은 늘 우리 손에 다가오지만,
그 전에 누군가의 손이 먼저 닿아 있었다.
그게 시립 도서관 정리사서 김씨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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