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라지만, 여전히 많은 시민들은 종이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는다.
출생신고서, 인감증명 신청서, 주민등록 정정신고서, 세대 분리 동의서…
그 수많은 종이들은 어디로 갈까?
누군가는 그 종이를 받아들고, 확인하고, 정확히 스캔한 뒤, 디지털로 기록해 남긴다.
윤경순(가명) 씨, 60세.
서울 ○○구청 민원실에서 문서 스캔 및 전자기록화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그녀의 책상 앞엔
오늘 하루 시민이 남기고 간 모든 서류가 차곡차곡 쌓인다.
“사람들은 그냥 접수하고 가지만,
그 종이는 저한테 한 번 더 들러요.
그리고 정확히, 아주 조심스럽게 디지털로 남겨져야 해요.”
오늘은 윤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종이 위 행정을 디지털로 이어붙이는 사람의 조용한 일상을 기록해본다.
오전 8시 30분, 하루가 시작되기 전 이미 서류는 도착한다
윤씨의 하루는 구청이 열기 직전부터 시작된다.
민원 접수가 본격화되기 전,
전날 야간무인접수기, 온라인 동시 접수,
그리고 각 부서에서 취합된 물리적 서류 뭉치가 그녀 책상 위에 놓인다.
“하루 평균 스캔 문서는 약 400장 정도예요.
많은 날은 800장 넘어요.”
그녀는 가장 먼저 스캔 가능 여부를 판단한다.
- 구겨진 문서 펴기
- 이중장 제거
- 클립 및 스테이플러 분리
- 주민번호나 민감 정보 블라인드 체크
“주민번호가 중간에 찢어진 종이에 있을 땐
스캔이 잘못되면 보안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반드시 육안으로 두 번, 시스템으로 한 번 더 확인해요.”
스캐너는 고속 양면 이미지 스캐너.
하지만 한 번에 여러 장이 끼거나, 줄이 흔들리면
데이터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서류가 밀려서 한 장이 빠지면
그 사람의 기록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기계가 해도, 최종은 사람이 해야죠.”
행정 문서엔 '틀림없이'라는 신뢰가 붙어야 한다
윤씨는 스캔이 끝난 문서를
문서관리시스템에 업로드하고, 메타데이터를 입력한다.
문서명, 날짜, 접수부서, 문서번호, 개인정보 보호 등급을 정확히 기입해야 한다.
“오타 하나로 행정 절차가 멈출 수 있어요.
실제로 ‘세대 분리’와 ‘세대 통합’을 반대로 올린 사건도 있었죠.
그래서 한 줄 한 줄 조심해야 해요.”
그녀는 스캔 오류가 없도록
이미지 밝기, 테두리 자르기, 텍스트 가독성까지 수작업으로 다듬는다.
그리고 모든 문서는 전산 서버와 외부 백업 디스크에 2중 저장된다.
윤씨는 민원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들의 글씨체나 찍힌 도장은 기억한다.
“한 번은 같은 분이 이사 신고서를 다시 썼는데,
도장 자국이 똑같은 걸 보고 ‘이건 잘못 올라간 거다’ 하고 다시 확인했죠.
그게 내 일이에요. 사람 대신 기록을 보는 눈이에요.”
문서 하나가 기록될 때마다, 도시는 조용히 진화한다
오후가 되면 민원실 창구에서 들어오는 서류도 본격적으로 늘어난다.
각 부서가 오후 2시~4시 사이에 문서함을 가져다 놓는다.
그녀는 기록물철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같은 양식이라도 페이지 수에 따라 스캔 방식을 달리 한다.
“1페이지 짜리는 바로 OCR(문자인식) 걸고,
2장이 넘어가면 스캔+수동 검토가 들어가요.
필기 내용은 인식률이 낮아서 사람이 읽어야 해요.”
시민들은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작성하고 창구를 떠나지만,
그 종이가 디지털로 잘못 저장되면 소송, 재심, 행정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스캔 담당자는 조용하지만,
사실상 행정의 ‘기록 담당 최종자’예요.”
윤씨는 업무를 하면서
누가 어떤 문제를 안고 왔는지,
누가 민감한 상황에서 무엇을 요청했는지
문서 형태만 보고도 대강 느낄 수 있다.
“혼자 와서 작게 써 내려간 신고서나,
도장이 삐뚤빼뚤하게 찍힌 이혼합의서 같은 건…
괜히 한 번 더 조심해서 스캔해요.”
윤씨가 바라는 건, 디지털 뒤에 있는 손을 기억하는 일
윤씨는 종종 사람들이 “이건 그냥 기계가 하면 되는 거잖아요?”라고 말할 때
작은 씁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기계는 한 장을 누락해도 모르고,
사람은 찢어진 한 구석을 보고 ‘이게 중요한 문서구나’ 판단하죠.
그게 우리가 필요한 이유예요.”
그녀는 오늘도
누군가가 남기고 간 신청서 한 장을 펼치며,
거기에 쓰인 볼펜 자국의 두께, 사인의 흔들림, 종이의 눌린 자국을 조심히 살핀다.
“디지털 행정이 완성되려면,
그 시작은 종이예요.
그 종이를 사람이 읽고, 정리하고, 기억해야
디지털도 정확해지는 거예요.”
오늘도 윤씨는
작은 스캔음과 함께 서류 한 장을 전자문서함에 저장하며
다음 사람의 이름이 쓰인 서류를 펼친다.
사람은 떠나고, 기록은 남는다.
그 기록을 남기는 손이 있다.
그게 구청 민원실 문서 스캔 담당 윤씨의 하루다.
조용한 자리에서 조용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기록을 지킨다
윤씨는 하루 대부분을 혼자 앉아 스캐너와 컴퓨터 사이에서 보낸다.
말을 나눌 동료도 거의 없다.
민원창구는 늘 북적이지만, 그녀의 자리에는 정적만이 쌓인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햇빛 방향이 바뀌어요.
그걸 보면, 내가 오늘도 꽤 많은 문서를 처리했구나 싶죠.”
스캔은 단순해 보이지만, 반복 속에서도 집중이 무너지면 오류가 생기는 일이다.
눈은 침침해지고, 손목은 뻐근해진다.
하지만 윤씨는 기계처럼 일하지 않기 위해,
가끔은 신청서에 적힌 사연을 마음속으로 한 번쯤 읽고 넘어간다.
“사람들이 써내는 말 중엔 조용히 위로가 필요한 것도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정확히 남겨주는 것뿐이죠.”
윤씨는 이 일을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녀의 손을 거쳐 간 문서들은 결국
한 사람의 재산을, 한 가족의 기록을, 한 도시의 흐름을 증명하는 데이터가 된다.
“내 일이 누군가의 인생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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