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시장은 음식 냄새, 사람들 목소리, 물건 고르는 손끝으로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생생한 풍경 뒤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기술의 작동이 있다.
고기점의 정육 냉장고, 생선가게의 수조 냉각기, 반찬가게의 쇼케이스, 김치 냉장고…
이 모든 장비들이 멈추지 않도록 24시간 대비하며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최종석(가명) 씨, 55세.
서울 ○○구에 위치한 전통 재래시장에서 냉장·냉동 장비 전문 수리 기사로 18년째 일하고 있다.
그는 전화 한 통이면 곧장 시장 구석으로 달려가,
철제 뚜껑을 열고, 누수와 냉매를 확인하고, 모터를 교체하며, 시장 상인의 하루를 복구한다.
“냉장고는 멈추면 장사가 멈춰요.
그래서 우리는 시간하고 싸워요.
‘지금 빨리’가 제일 많은 말이에요.”
오늘은 최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재래시장의 음식 온도를 지키는 기술자의 손끝을 기록해본다.
오전 7시 20분, ‘시장 고장 리스트’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최씨는 하루를 시장 상인의 부재중 전화 목록 확인으로 시작한다.
시장엔 모두 30개 넘는 가게들이 각기 다른 냉장 장비를 쓰고 있다.
고기냉장고, 스탠드 쇼케이스, 수산물 수조 냉각기, 온장고, 조리 보관 냉장고까지 다양하다.
“전날 저녁 9시에 온 전화는
정육점 고기 쇼케이스에서 물이 흐른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럼 그날 첫 작업은 정해지는 거죠.”
그는 첫 번째 현장에 도착해
먼저 바닥 누수 상태를 보고 응축기와 배수 호스를 분해한다.
“대부분은 막힘이나 팬 문제예요.
냉각 기능은 살아있는데, 물만 배출이 안 되면 바닥으로 흐르죠.”
시장 냉장고는 오래된 기종이 많고,
가게마다 구조가 달라 수리 매뉴얼이 없고 전부 ‘현장 감각’이 필요하다.
“이건 일하면서 익힌 손 기억이 하는 일이에요.
어디 나사가 녹아 있고, 어디가 낡았는지 눈이 아니라 손이 먼저 알아요.”
시장은 고장 나기 전에 움직여야 유지된다
최씨는 단순히 고장 후 수리만 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미리 고장 나기 쉬운 부품을 점검하고,
소리가 이상한 모터나 팬을 교체하며
‘사전 정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장사하는 분들은 고장 나서야 연락하지만,
그땐 고기도, 생선도 다 버려져요.
그 전에 잡아줘야 진짜 일 잘했다고 하죠.”
그는 상인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냉장고 소리 변한 건 없으세요?”
“아이스박스 뒷면 냉기 괜찮으세요?” 같은 말을 먼저 건넨다.
거기서 나온 1초짜리 대답이
큰 사고를 막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그는 하루에 평균 5곳에서 냉매를 주입하고,
2곳은 냉동기 또는 컴프레서를 교체한다.
무거운 기계를 틈새로 빼내고, 낡은 배선을 잘라내는 일은
단순 노동이 아니라 반복된 ‘즉각 판단의 연속’이다.
시장의 냉기를 지키는 건, 체력보다 관계다
시장 수리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술보다 신뢰다.
최씨는 말한다.
“여긴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 마주치는 곳이에요.
한 번 고장 못 잡으면 다음부턴 안 불러요.”
그래서 그는 말투부터 조심한다.
“정육점 사장님 고기는 잘 나와요?”
“김치냉장고 어제 건 괜찮죠?”
그 짧은 인사가 시장 속에서 기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의 열쇠가 된다.
냉동기가 고장 나 고기 색이 변한 날,
그는 사비로 아이스박스를 가져다 놓고 응급 조치까지 했다.
“정식 계약은 아니지만, 그냥 같이 장사하는 식구 같아서요.
시장이라는 건 결국 그런 곳이에요.”
최씨가 바라는 건, 기술 이전에 신뢰가 보존되는 시장
최씨는 시장 냉장고 수리를 단순 기술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은 누구나 익혀요.
하지만 시장은 기술보다 신뢰를 먼저 줘야 일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는 매일 가방에 부품 외에도
가게 전화번호 수첩, 수건, 절연테이프, 물티슈, 작은 야광 손전등을 넣고 다닌다.
그 안엔 그가 하루를 버티는 모든 장비가 담겨 있다.
퇴근 무렵, 그는 늘 마지막으로 시장 뒷골목 두 곳을 순찰하며 온도를 만져본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면 알아요.
아, 오늘은 다 괜찮구나.”
재래시장 냉장고는 전기로 움직이지만,
그 흐름을 살피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게 냉장고 수리 기사 최씨의 하루다.
고장보다 더 무서운 건, ‘놓치는 순간’
최씨는 시장을 돌다 보면 냉기 이상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놓침’이라고 말한다.
“가게 하나를 깜빡하거나, 어떤 팬 돌아가는 소리를 못 들으면
그 다음 날은 고기색이 변하고, 물이 넘쳐요.
그건 단순 고장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죠.”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감각 루틴’을 만든다.
정육점은 항상 오전, 생선가게는 오후, 반찬가게는 마지막.
각 가게마다 ‘가장 취약한 시간대’에 방문해
조용히 기계를 살핀다.
“눈으로 보는 건 다가 아니에요.
손으로 만져봐야 진짜 온도를 알 수 있어요.”
그는 특히 폭염이나 한파가 닥치는 계절엔
기계보다 상인들의 표정을 먼저 본다.
누군가 유난히 말이 없다면, 그건 그날 장사가 잘 안 풀렸거나
기계에서 문제가 있었던 날일 가능성이 높다.
“시장에선 기계 소리만 들어서는 안 돼요.
사람 소리를 같이 들어야 진짜 수리가 돼요.”
최씨가 지키는 건 냉장고가 아니라 시장의 숨결이다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 시장에 남은 온기는 미지근한 전등 아래 깔려 있다.
문을 닫은 가게 사이로, 최씨는 혼자 조용히 지나간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던 수산가게.
문은 닫혔지만, 수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는 여전히 작게 울린다.
“내가 없을 때도 기계가 돌아가게 해야 해요.
그게 진짜 잘 고친 거예요.”
최씨는 고장 한 건 없이 하루를 마친 날이면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 작업 일지를 다시 한 번 꺼내본다.
낙서처럼 남긴 메모에도 ‘물 온도 체크 완료’, ‘가스 주입 정상’ 같은
작은 흔적이 남는다.
“나는 냉장고를 고치는 게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의 하루를 지켜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다음 날 다시 문 열 수 있게 해주는 게 내 일이에요.”
재래시장은 사람 냄새와 기계 온도가 함께 숨 쉬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온도를 지키는 손끝이 있다.
그게 수리기사 최씨의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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