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농촌 우체국 집배원 박씨의 하루: 편지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사람들은 이제 손편지를 쓰지 않는다.
청구서도, 공문도, 등기우편도 점점 줄고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멀어진 곳일수록, 우편은 여전히 삶의 일부다.
편지는 물건이 아니라 소식을 담은 손의 흔적,
그리고 도착했다는 안정감의 상징이 된다.

박성우(가명) 씨, 52세.
강원도 ○○군의 농촌 우체국에서 17년째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매일 비포장도로, 좁은 산길, 외딴 집들을 따라
편지와 소포, 보험 서류, 소액 연금 수령 알림장
을 손에 들고 이동한다.

“우편물이 줄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게 아직도 유일한 연결 수단인 곳이 있어요.
나는 그 끈을 붙잡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오늘은 박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편지가 멈추지 않는 삶의 자리를 지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편지를 배달하는 농촌 우체국 집배원

오전 7시 40분, 봉투보다 먼저 확인하는 건 날씨다

박씨는 출근하자마자 날씨부터 체크한다.
“오늘 비가 오면 이쪽 고갯길은 못 넘어요.
우회 도로로 돌려서 30분 더 걸리죠.”
그는 하루 배달을 시작하기 전
지역별 도로 상황, 강풍 예보, 산간 적설량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서울처럼 큰 도로가 없는 데는
길 자체가 배달을 좌우해요.
소포보다 길이 더 문제예요.”

그는 오전 8시 반부터 우편물 분류와 동선 정리를 시작한다.
전날 미처 가지 못한 등기우편,
한 달에 한 번 오는 건강보험 공지,
정기적으로 받는 연금통지서…
그는 봉투마다 받는 사람의 얼굴과 집 위치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아, 이 분은 어제 부재중이었지.
오늘은 있을 테니 조금 늦게 가야겠네.”

 

외딴 골목, 끊어진 길 끝에도 도착해야 하는 책임

박씨의 오토바이는 도심 집배원들과 다르다.
진흙길에 빠지지 않도록 바퀴가 두껍고,
짐칸은 방수포로 감싸져 있으며,
위에는 햇빛과 비를 막는 차양막
이 설치돼 있다.

그는 한 번 나가면 3~4시간을 이동하며
10개 넘는 마을을 돈다.
주소 없는 농가도 많고, 벨이 없는 대문도 많다.

“집 앞에 신발이 보이면 계시다는 거고,
검은 봉지가 있으면 이틀째 안 나왔다는 뜻이에요.
그걸 눈으로 익히는 게 경험이에요.”

그는 편지를 전달하며
안부를 묻고, 부재중인 경우엔 지붕 밑 나무 상자에 넣고,
메모까지 함께 끼워둔다.

“문자나 전화보다
손으로 쓴 메모 한 줄이 더 안심이 되거든요.
어르신들이 ‘참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내가 참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구나 싶어요.”

 

박씨가 옮기는 건 우편이 아니라 일상의 연결이다

배달이 끝나는 오후 3시 무렵,
그는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와 정산을 하고,
남은 반송물이나 이사 간 주소지를 정리한다.

가끔은 고령의 어르신이 편지를 다시 부쳐달라며
“글씨를 잘못 썼다”며 찾으러 오는 일
도 있다.
박씨는 그럴 때마다
봉투를 조용히 돌려주며
“천천히 써도 괜찮다”고 말한다.

“사람은 마음이 흔들릴 때 글씨도 흔들리거든요.
그게 눈에 보이면, 잠깐 쉬어가게 해줘야 해요.”

그는 우편물보다
‘받는 사람의 반응’을 더 오래 기억한다.
눈빛, 목소리, 한숨, 웃음.
그게 편지가 전해졌다는 증거이자,
자신이 그날 제대로 일했다는 신호다.

길이 없어도 편지는 도착해야 하고,
사람이 외로워도 손길은 이어져야 한다.

 

편지를 전하다, 사람의 삶을 함께 안게 되다

박씨는 배달을 하며 사람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는 순간이 많다고 말한다.
“처음엔 그저 이름만 아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그 분의 건강 상태, 가족 이야기,
심지어 오늘 어떤 약을 받았는지까지 들려주세요.”

특히 혼자 사는 어르신들은 편지를 핑계로 박씨에게 말을 건다.
“이건 뭐지?”, “이거 좀 읽어줘요.”
그 짧은 순간에 박씨는 집배원이자 해석가, 그리고 동네 가족이 된다.

“가끔은 어떤 봉투는 열지도 않고 그냥 ‘버려줘요’라고 하세요.
그건 아픈 소식이거나, 본인이 이미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죠.
그럴 땐 조용히 ‘네, 알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가져와요.”

박씨는 배달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배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편지는 줄어들지만, 마음은 여전히 종이 위에 남는다

도시에서는 손편지와 우편이 사라지고 있지만,
농촌은 다르다.
인터넷 뱅킹 대신 통장 우편을 기다리고,
카카오톡 대신 손편지로 생일을 축하
한다.

“어떤 어르신은 손자한테 받은 손편지를
10년 넘게 그 서랍 속에 그대로 두고 계시더라고요.
그 편지가 삶의 중심이에요.”

박씨는 종이 한 장이 갖는 무게를 알고 있다.
그가 전달하는 건 단순한 통보가 아니라,
때로는 “잊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봉투 하나에 담긴 건 그리움,
어떤 땐 돈보다 무거운 게 들어 있어요.
그걸 내가 전달한다고 생각하면,
이 일이 절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아요.”

 

박씨가 바라는 건, ‘도착했다’는 말이 계속 이어지는 세상

박씨는 말한다.
“배달이 끝났다는 건
누군가의 기다림이 끝났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릴 때마다
“잘 도착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어르신이든, 주소가 흐릿한 집이든,
멀리 떨어진 마을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편지가 하루의 유일한 방문일 수도 있어요.
그걸 알고 나면, 그냥 넘길 수 없어요.”

그는 오늘도 출근하며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오늘도 모든 편지를 정확히,
그리고 조용히 도착하게 하자.”

길이 좁아도, 주소가 희미해도,
편지가 도착하는 한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끝에 서 있는 사람.
그게 농촌 우체국 집배원 박씨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