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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수도계량기 검침원 송씨의 하루: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를 읽는 사람

도시의 물은 늘 당연하게 흐른다.
수돗물은 끊임없이 나오고, 세면대도, 세탁기도, 샤워기마저
별다른 인식 없이 편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엔, 한 달에 한 번
사람이 직접 걸어서, 각 가정의 수도계량기를 들여다보고,
그 숫자를 손으로 적어내는 직업이 존재
한다.

송은자(가명) 씨, 62세.
서울 강서구 일대의 주택, 빌라, 상가 밀집 지역에서
수도계량기 검침원으로 13년째 일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매달 1일부터 15일까지
약 1,200세대를 직접 방문하며
건물 뒷골목, 주차장, 지하실, 옥상 수도함 속에 있는 계량기의 숫자를 읽는다.

“요금은 자동으로 나와도,
그 기초가 되는 숫자는 자동이 아니에요.
그걸 내가 두 발로 가서 봐야 해요.”

오늘은 송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도시의 물줄기를 수치로 기록하는 사람의 조용한 발걸음을 기록해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숫자를 읽는 수도계량기 검침원

오전 8시, 낯선 초인종 대신 수돗물함을 먼저 두드린다

송씨의 하루는 손에 들린 검침표와 기록지로 시작된다.
관리소에서 프린트한 일정표를 들고,
담장 너머 수도함이 보이는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안전한지
매일 새로운 동선을 조심조심 밟아간다.

“아파트는 한 칸에 다 모여 있어서 편한데,
단독주택은 하나하나 찾고 들어가야 해요.
좁은 골목 안쪽에 수도함이 있는 집도 많아요.”

송씨는 장갑을 끼고, 계량기 유리창의 먼지를 닦아낸 후
계량기 숫자(㎥ 단위)를 읽고 종이에 적는다.

수치는 보통 5자리,
그 앞의 숫자 하나가 수백 리터의 물 사용량을 의미한다.

“눈부시면 숫자가 안 보여요.
그래서 고개를 기울이고, 빛을 가리고,
숨을 멈추고 읽어야 할 때도 있어요.”

하루에 150세대 이상을 방문하기 때문에
‘눈 + 다리 + 허리’의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계량기는 숫자만 말하지만, 그 뒤엔 사람의 사정이 있다

계량기 숫자는 겉으론 단순하지만,
송씨는 그 안에서 삶의 변화나 위험 신호를 감지한다.

“갑자기 수치가 수십 단위 늘어난 집은
대부분 누수예요.
세면대 호스가 터졌거나, 변기 물이 계속 내려가거나.”

이상 수치를 발견하면
그는 고지서에 빨간 펜으로 '누수 의심' 표시를 한다.
어르신 혼자 사는 집이나 장기간 비어 있는 건물은
'0'이 계속 찍히는지도 확인한다.

“빈집인데 계속 물이 쓰이면 도둑이 들었거나,
호스가 새는 거죠.
그걸 빨리 알리는 것도 내 일이에요.”

가끔은 집주인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며 불만을 토로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사용량 변화 추이를 설명하고,
“제가 봤을 땐 누수예요”라고 말해주면
오히려 감사하다는 연락이 나중에 온다.

 

송씨가 읽는 건 숫자가 아니라 도시의 리듬이다

송씨는 말한다.
“물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요.
샤워를 자주 하는 집, 세탁을 많이 하는 집,
오래 비어 있는 집까지 다 느껴져요.”

그녀는 계량기 옆에 핀 잡초,
녹슨 계단, 휘어진 수도관을 기억한다.
그건 종이에 적히지 않는 도시의 결이다.

“어떤 날은 비가 와도 계속해야 하고,
한여름 더위에도 지하실로 들어가야 해요.
근데 계량기 앞에 이름 모를 고양이 한 마리 앉아 있으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져요.”

송씨는 자신이 읽는 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도시를 이루는 수천 개 가정의 물 흐름과 온기
라고 믿는다.

그걸 기록하고, 전달하고,
다음 달에도 또 확인하는 사람.

 

“사람이 살아 있는 집은 물소리로 안다”

송씨는 수도계량기의 숫자뿐 아니라, 그 집의 분위기까지 기억한다고 말한다.
“어떤 집은 수도함 열면 안에 수건이 곱게 개어 있고,
어떤 곳은 녹이 슬어 있어요.
그거 보면, 그 집이 어떤지 느낌이 와요.”

그녀는 물소리도 기억한다.
세면대 물이 ‘콸콸’ 쏟아지는 집,
작은 샤워기 소리가 새어나오는 집,
혹은 긴 시간 물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빈집.

“사람이 있다는 건
어디선가 물이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이 없으면, 그 집은 조용해요.
그 침묵을 알게 돼요.”

검침을 반복하면서
송씨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민감해졌다.
그건 단순 업무가 아니라,
도시 속 ‘살아 있는 집’을 느끼는 직관이다.

 

불편한 일도 많지만, 다시 내일 갈 수 있다는 마음

검침 업무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지만
반대로 불편함을 자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닫힌 대문, 거센 개 짖음, 계단 없는 고지대,
그리고 때론 "왜 몰래 들어오냐"며 날을 세우는 말들.

“우리는 미리 공문도 붙이고, 시간대도 정하는데
그래도 불쾌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땐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나죠.”

송씨는 이런 경험들이 익숙해졌다고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다시 갈 수 있는 건
“그래도 대부분은 따뜻하게 맞아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을 아껴야 한다며 자기 수도요금 내역을 보여주는 어르신,
수박 한 조각 썰어주는 아주머니,
‘이 더위에 고생한다’며 얼음물 건네주는 분…
그게 나한텐 하루의 힘이 돼요.”

 

송씨가 지키는 건 숫자보다, 도시의 리듬과 예의

검침이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송씨는 각 수치를 정리해 입력하고,
누수 의심 가구를 따로 표기해 보고한다.
하루 6시간 넘게 걸은 기록이
숫자 몇 줄로 남지만, 그녀는 그 속에 사람의 생활이 담겼다고 믿는다.

“내가 읽은 숫자 하나가
그 집의 한 달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대충 할 수 없어요.”

그녀는 검침을 ‘도시의 예의’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문 두드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방법이 검침이에요.
그래서 조용히, 정중하게 해야 해요.”

숫자를 읽는 손,
그리고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

그게 수도계량기 검침원 송씨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