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판기 앞에서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른다.
천 원을 넣고, 원하는 음료를 고르고, 버튼을 누르면
“쿵” 소리와 함께 캔이 떨어지고 갈증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익숙한 일상의 순간은
기계가 늘 제대로 작동한다는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정해수(가명) 씨, 54세.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자동판매기 설치·보수·보충 업무를 맡은 지 12년째.
그는 하루 평균 10~15곳의 자판기를 돌며,
고장 수리, 고지서 출력, 재고 확인, 잔돈 보충, 내부 청소까지 전담한다.
“사람들은 자판기가 멈추면 불만을 말하지만,
그걸 고치는 사람에 대해선 잘 몰라요.
우리는 도시 속 작은 불편을 막는 사람이에요.”
오늘은 정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도시의 무심한 기계 사이를 누비는 손의 기록을 담아본다.
오전 7시 30분, ‘잔돈 없음’ 알람이 울리는 곳부터
정씨의 하루는 스마트폰 앱의 장애 알림 메시지로 시작된다.
설치된 자판기는 실시간으로 상태를 보내온다.
‘품절’, ‘동전함 가득참’, ‘온도 이상’, ‘문 미개방’
이 중 한 가지라도 뜨면 바로 방문 대상이다.
“출근길 역사에 있는 자판기가 멈추면
사람들 하루 시작이 불편해져요.
그래서 가장 먼저 그쪽부터 갑니다.”
그는 첫 번째 방문지로 지하철역 2번 출구 자판기를 선택했다.
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하니 냉장 컴프레서가 과열로 멈춘 상태.
그는 먼지를 청소하고, 리셋 스위치를 눌러 재가동시킨다.
“자판기 안은 여름에 45도까지 올라가요.
안쪽에서 오래 작업하면 땀이 뚝뚝 떨어지죠.”
점검을 마치고 다시 문을 닫고 나올 때,
벌써 첫 손님이 천 원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정씨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기계가 곧바로 다시 살아났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죠.”
자판기 뒤편에서 쪼그려 앉는 시간이 하루의 절반
자동판매기 보수는 단순히 고장 수리만이 아니다.
정씨는 매일 수백 캔의 음료를
냉장 순서에 맞게 재입고하고,
잔돈(동전·지폐)을 보충하고,
수익 정산 영수증을 출력하고,
기계 청결 상태를 점검한다.
“가장 많이 걸리는 시간은 사실 재고 채우는 거예요.
냉장고처럼 안쪽부터 순서 맞춰 넣어야 골고루 차갑거든요.”
그는 병원, 학교, 공원, 아파트 단지 등
공공 공간에 설치된 자판기일수록 더 꼼꼼히 관리한다.
한 번은 학교 자판기 안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민원이 들어와
전체 해체 후 내부 세척을 하루 종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서 작업하니까
무릎보다 허리가 더 아파요.
근데 그 자세가 익숙해졌어요.
이젠 자판기 문 열면 몸이 먼저 반응해요.”
정씨가 고치는 건 고장만이 아니라 ‘작은 불만들’이다
자판기는 고장이 나면 눈에 띄지만,
작은 불편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정씨는 그래서 항상 이용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살핀다.
“캔이 너무 세게 떨어지는지,
불빛이 너무 어두운지,
버튼 반응이 느린지…
이런 것도 자판기 수리의 일부예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 원 넣었는데 안 나와요’라는 민원 전화를 받는다.
그럴 때는 현장에 가서 돈을 돌려주고,
해당 기계의 센서나 버튼을 직접 점검한다.
“어떤 분은 전화로 ‘이런 일로 기사님까지 부르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세요.
그 말이 진짜 고마워요.
우리가 하는 일이 ‘불편을 수습하는 일’이란 걸 이해해주시니까요.”
정씨는 자판기를 “사람과 기계 사이의 접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갈증을 채우는 순간,
그 기계가 멈추지 않도록 매일 뒤에서 손을 대는 사람.
정씨에게 자판기는 ‘기계’가 아니라 ‘작은 가게’다
정씨는 자판기를 단순한 기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매일 문을 열고, 청소하고, 물건을 채우고, 잔돈을 확인하는 일을
“내 가게 문 열고 장사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누가 오는지 모르지만,
언제 누군가는 꼭 찾아와요.
그래서 항상 안에 있는 음료들 진열을 신경 써요.”
정씨는 자판기를 채울 때
날씨, 시간대, 설치 장소의 특성까지 고려한다.
학교 앞 자판기엔 당류 적은 음료를,
병원 로비엔 무가당 생수와 따뜻한 차를,
공원 자판기엔 아이스크림과 스포츠 음료를 더 넣는다.
“어떤 자판기 앞에서는
사람들이 정말 필요해서 오는 거거든요.
그게 느껴질 때, 더 정성 들이게 돼요.”
사람들이 모르는 ‘작은 보람’이 쌓일 때
정씨는 일하다 보면 가끔
자판기 앞에서 잔돈을 챙기거나 음료를 기다리는 사람과 마주친다.
그런 순간이 오히려 가장 따뜻한 순간이라고 한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한 마디 들을 때가 있어요.
특히 동전 끼었을 때 제가 바로 가서 해결하면
그 짧은 고마움이 하루를 버티게 해요.”
그는 어떤 날엔
자판기 위에 누군가 놓고 간 음료나 메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감사했습니다’, ‘더운 날 수고하세요’ 같은 손글씨 메모가
하루 종일 땀 흘린 손에 닿을 때면
몸은 지쳐도 마음은 가벼워진다.
“내 얼굴 모르는 사람이
내 일에 고마움을 표현했다는 거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나도 다시 잘 해보자 싶어지니까요.”
정씨가 바라는 건 ‘멈추지 않는 기계, 잊히지 않는 손’
정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기계를 돌리는 일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기계는 사람이 쓰는 거예요.
멈추면 불편하고,
계속 돌아가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죠.
그 ‘당연함’을 매일 지켜내는 게 제 일이에요.”
그는 매일같이 똑같은 구조,
똑같은 순서로 문을 열고, 음료를 채우고, 청소를 반복한다.
그 반복 속에서
“나만 아는 흔적, 나만의 방식, 나만의 책임”이 쌓여간다.
“나는 작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그 자판기 하나가 그 공간의 편안함을 만든다고 믿어요.
그걸 내가 매일 돌보고 있다는 게
내 직업의 가치예요.”
정씨는 멈춘 기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음료를 뽑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움직이게 한다.
그게 자동판매기 보수원 정씨의 하루다.
'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약 살포 드론 조종사 이씨의 하루: 하늘 위에서 논밭을 관리하는 사람 (1) | 2025.07.17 |
---|---|
수도계량기 검침원 송씨의 하루: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를 읽는 사람 (0) | 2025.07.16 |
농촌 우체국 집배원 박씨의 하루: 편지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 (0) | 2025.07.15 |
야간 도로 청소차 운전원 이씨의 하루: 도시가 잠든 사이 길을 닦는 사람 (0) | 2025.07.14 |
철거 현장 안전감시원 장씨의 하루: 무너지는 공간 속 질서를 지키는 사람 (1) | 2025.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