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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외 직업군 인터뷰 기록

고물상 수거인 박씨의 이야기: 쓰레기 속에서 삶을 줍다

거리의 끝자락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이른 새벽, 도시의 골목 어귀에서 뭔가를 싣고 끄는 바퀴 소리가 들린다.
알루미늄, 종이박스, 플라스틱, 고철… 사람들은 버렸지만 누군가에겐 아직 '쓸모'가 남은 것들이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시간,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길 위에서 고물 수거인들은 하루를 시작한다.

박종태(가명) 씨는 올해 66세.
서울 동작구 일대에서 고물 수거 일을 한 지 11년째 되는 어르신이다.
그는 하루 10시간 넘게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종이와 플라스틱, 고철을 모은다.
‘고물상 수거인’, 혹은 ‘폐지 줍는 노인’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단순 노동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현실이 있다.

박씨는 말한다.
“이게 쓰레기라고요? 아니요. 이건 내가 오늘 먹고살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오늘은 박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람, 그리고 그가 모으는 것들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고물상을 수거하는 박씨의 손수레

새벽 4시, ‘누가 먼저 나왔는가’로 하루가 갈린다

박씨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그는 낡은 고무장화를 신고, 끈으로 묶은 손수레를 끌고 집을 나선다.
서울 도림천 근처에서 출발해 노량진, 상도동을 지나 흑석동 쪽으로 하루 코스를 돌며 종이박스와 캔, 플라스틱을 수거한다.

“이 일은 누가 먼저 나오느냐가 중요해요.
아침 6시만 돼도 이미 다들 돌아다니니까, 4시엔 나와야 양이 돼요.”

그가 수거하는 주요 품목은 종이, 신문지, 스티로폼, 고철, 알루미늄 캔 등이다.
하지만 품목에 따라 단가가 크게 차이 난다.
종이는 1kg당 70원, 캔은 1kg당 900원, 플라스틱은 그보다 적다.
박씨는 하루 평균 60~70kg을 수거하면 8,000원에서 1만5,000원 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다.

문제는 점점 경쟁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은 젊은 사람도 나와요.
무단 투기한 대형 폐지 같은 건 새벽에 금방 사라져요.”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거 구역도 넓어졌고, 손수레 끄는 거리도 길어졌다.

그는 한여름에도 팔토시와 모자를 쓰고 다닌다.
햇빛은 뜨겁고, 도로 위는 위험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나한테는 노동이고, 남한테는 그냥 풍경이죠.
근데 풍경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쓰레기인가 자원인가,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다

박씨는 손수레를 끌고 골목을 돌 때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느낀다.
대부분은 무관심이고, 어떤 이들은 창문을 닫거나 길을 돌아간다.
“쓰레기 주운다고, 냄새난다고 피하는 사람 많아요.
근데 이거 다 버린 게 누군데요? 내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가끔은 대놓고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길막지 말라, 왜 남의 집 앞에 세워놓냐, 그런 말 듣는 날엔 진짜 마음이 무너져요.”
하지만 그는 화도 낼 수 없다.
“누구 말 맞다나, 나같은 사람은 ‘소리 안 나는 쓰레기’처럼 여겨지니까요.”

박씨는 예전엔 철공소에서 용접사로 일하던 숙련 노동자였다.
하지만 50대 초반 사업이 무너지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일할 곳이 없었다.
“그땐 나도 이 일 하는 사람들 보면 안 됐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내가 되고 나니,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그는 수거한 폐지와 자재를 인근 고물상에 직접 가져간다.
무게는 수작업으로 달고, 가격은 매일 바뀐다.
“비 오면 다 젖어서 돈도 안 줘요.
비닐이라도 씌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또 돈이 들죠.”
그는 버려지는 것을 모아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묵묵히 손수레를 끈다.

고단하지만 하루를 살아낸다는 자부심

박씨는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몸보다 마음이라고 말한다.
"허리는 아파도 버틸 수 있어요.
근데 사람들 눈 피해서 걷는 건 정말 힘들어요."

고물 수거인의 하루는 철저히 혼자다.
도시 한복판을 다니지만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말 한마디 없이 하루를 보내는 날도 많다.
“가끔은 내가 투명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지나가요. 아무도 없던 사람처럼.”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말을 거는 건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수거인들이다.
“가끔 골목에서 마주치면 인사해요.
서로 몇 시쯤에 나왔는지, 어디 코스가 괜찮은지 물어보죠.
그게 전부예요. 그게 다예요.”

그는 가끔 길에 버려진 아이들 장난감이나 헌 책을 보며 옛생각에 젖는다.
“저거 우리 딸이 어릴 때 좋아하던 인형인데…
이제는 애들도 다 커서 연락도 못 해요.”

박씨는 손수레를 끌면서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실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돈이 많진 않지만, 내가 번 돈으로 밥 사 먹고, 고시원 월세 내고, 병원 다녀요.
남한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겐 하루가 하루예요.
쓰레기 속에서 모은 삶이지만, 이건 분명히 내 삶이에요."

박씨가 바라는 건 연민이 아니라, 이해다

박씨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이는 계속 들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팔에 힘이 빠지는 날이면 박스를 수레에 실다가 그대로 주저앉기도 한다.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도 한숨이 먼저 나와요.
그래도 오늘 또 한 번 돌아다닐 수 있으면 다행이죠.”

그가 바라는 건 크지 않다.
“길에서 고물 줍는 사람 보면, 피하거나 이상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우린 남의 걸 훔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땀 흘려서 사는 거예요.”

박씨는 언젠가 이 일을 그만둘 날이 오면,
고물상 사장님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한테 돈 주고, 나도 일한 만큼 먹고 살 수 있게 해줬잖아요.”

그는 오늘도 묵묵히 손수레에 로프를 감고,
도시 한복판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사람들은 그를 보지 않지만, 그는 도시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어디서 삶이 남았는지.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다시 하루를 버틸 힘이 들어 있다.
그리고 박씨는 그 삶의 조각들을 주워 하나씩 모아간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시의 흐름을 지탱하는 누군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