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동차가 멈추는 순간, 누군가의 일이 시작된다
서울 지하철은 하루 평균 약 800만 명이 이용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과 저녁,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선로 위에 매일 밤 누군가가 엎드려 있는 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동차가 모두 운행을 마친 후, 지하철 선로 보수원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박경수(가명) 씨는 서울 지하철 5호선 유지보수팀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선로 보수원이다.
그는 매일 밤 11시 40분부터 새벽 4시 반까지, 열차가 완전히 멈춘 시간을 이용해 레일, 침목, 체결장치, 전선 등을 정비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철로에 들어가면, 시간은 곧 생명이에요.
딱 새벽 4시 반까지만 작업하고, 그 전엔 다 나와야 해요.
안 그러면 열차가 그대로 들어옵니다.”
오늘은 박씨의 하루를 따라가며,
우리가 안전하게 출근하고 귀가할 수 있는 지하철의 뒤편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명해보자.
마지막 열차가 지나가고, 선로 작업이 시작된다
박씨는 저녁 10시 30분쯤 근무복을 입고 팀 사무실에 모인다.
팀원들과 그날의 작업 내용을 확인하고, 각자 맡은 구간과 장비를 체크한다.
장비는 간단한 공구세트부터 전동 드릴, 침목 교체 장비, 전기 측정기, 경보등, 무전기, 안전표시판 등까지 다양하다.
“열차가 지나가고 나면, 우린 바로 선로에 들어가요.
작업 시간은 많아야 4시간. 그 안에 철로 수리도 하고, 검사도 하고, 정리까지 끝내야 하죠.”
박씨의 주요 업무는 레일의 이음부와 침목 상태 점검이다.
레이저 측정기와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이음쇠에 금이 가거나 볼트가 풀린 부분을 조여주고, 마모된 구간은 교체한다.
특히 급커브 구간이나 낙차 있는 지형에서는 철로 마모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집중해서 살핀다.
“한번은 침목이 썩어 있어서 교체하려고 들어냈는데,
그 안에 고양이 사체가 있었어요.
그 냄새랑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그런 게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이에요.”
박씨는 작업 중 소리와 진동에 가장 민감하다.
“레일에서 이상한 울림이 나면, 어딘가 벌어지거나 충격이 가해졌다는 뜻이에요.
그걸 듣고 잡아내야 해요.”
시간에 쫓기고, 어둠 속에서 일하는 고요한 긴장
지하철 선로는 낮에 접근할 수 없다.
전동차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고전압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작업 가능 시간은 운행 종료 후부터 새벽 첫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단 4~5시간뿐이다.
“우리는 시간과 싸워요.
한 군데라도 작업이 밀리면 다음 열차 운행 전체가 지연돼요.
그럼 시민들 출근에 차질이 생기고, 우리가 책임져야 하죠.”
박씨는 현장에서 극도의 집중 상태를 유지한다.
무전기로 통제실과 실시간으로 연락하며, 모든 작업은 2인 1조로 움직인다.
한 사람은 작업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주변을 감시하며 비상 탈출 루트와 열차 진입시간을 체크한다.
“한 번은 비상 경고등이 꺼진 줄도 모르고 작업했어요.
갑자기 통제실에서 ‘열차 투입 시작’이라고 외치는데, 정말 등골이 서늘했죠.
몇 초 늦었으면 큰 사고였어요.”
지하철 선로는 단순한 철판이 아니다.
위에 전차선, 밑에는 절연판, 레일과 전동차 간의 정밀한 간격 조정까지
하나라도 어긋나면 곧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정밀 시스템이다.
박씨는 매일 밤 그 시스템을 다시 ‘기본’ 상태로 돌려놓는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도시의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
박씨는 이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처음엔 서운함을 느꼈다.
“아침에 전동차가 다니는 건 당연한 줄 알잖아요.
근데 그거 당연하게 만들려고 우리가 밤새 일하는 건 아무도 모르죠.”
그는 가끔 출근길 전동차 안에서 자신이 정비했던 구간을 지나갈 때
작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어제 내가 그 레일 아래에 있었거든요.
오늘도 열차가 무사히 달리면, 그걸로 된 거예요.”
지하철 선로 보수원은 몸도 힘들고, 가족과의 시간도 적다.
낮에는 잠을 자야 하고, 주말이나 명절에도 철도는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근무가 이어진다.
“애들이 커가는 걸 잘 못 봤어요.
그래도 그때마다 아내가 ‘사람들 발 밑이 당신 덕분에 안전하잖아’라고 말해줘요.
그게 힘이 돼요.”
그는 때때로 “누구 하나 알아봐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하철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
그게 곧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박씨가 바라는 건 안전과 작은 존중
박씨는 이제 50대 중반을 넘겼고,
어깨와 손목은 만성 통증이지만 아직 은퇴 계획은 없다.
“이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맡은 선로만큼은 사고 없게 하자는 생각으로 일해요.”
그가 바라는 건 크지 않다.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면 사람들 불편해하잖아요.
그만큼 평소에 누군가 그걸 지키고 있다는 것도 떠올려줬으면 해요.”
또한 그는 야간 노동에 대한 이해와 최소한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린 밤새 일하지만, 다음 날 병원도 못 가요.
병원은 오전에만 열고, 우린 그 시간에 자야 하니까요.”
박씨는 오늘 밤도 같은 시간, 같은 구간으로 출근할 것이다.
그는 열차가 지나가기 전 모든 장비를 챙기고,
어둠 속 철로에 엎드려 작은 균열 하나를 찾아낸다.
그가 있기에 지하철은 달린다.
보이지 않는 밤의 손길 덕분에 도시는 또다시
지하에서부터 무사히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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