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별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삶의 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 끝을 맞이하는 공간, 바로 장례식장에는 언제나 조용한 울음과 바쁜 발걸음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슬픔과 이별의 공간으로 기억하지만, 그곳을 ‘일터’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김연숙(가명) 씨는 올해 57세.
서울 시내 종합병원 장례식장에서 도우미로 일한 지 15년째 되는 해다.
수많은 상을 치렀고, 매일 다른 이들의 이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다.
그녀는 말한다.
“이 일은 감정을 품으면 못 해요. 그렇다고 감정이 없으면 또 못 하죠.”
장례식장 도우미는 상주도 아니고, 유가족도 아니며, 손님도 아니다.
그저 이별의 풍경 속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위해 조용히 움직이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다.
오늘은 김 씨의 하루를 통해 사람들이 애써 외면해온 직업,
그러나 꼭 필요한 한 세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조용하지만 바쁜 장례식장, 일은 죽음과 동시에 시작된다
김씨의 하루는 사망 진단이 내려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병원 장례식장에 근무하는 도우미들은 의사 소견서가 접수되면 곧장 업무에 들어간다.
가족들이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동안, 빈소 정리, 제단 준비, 장의용품 세팅 등을 맡는다.
“보통 1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해요.
가족들은 정신이 없고, 시간은 촉박하고, 감정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김씨는 유가족들이 편히 울 수 있도록, 실수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빈소를 세팅하면서도 모든 손님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향로 위치, 의자 간격, 물컵 비치, 종이컵 보충, 커피포트 온도까지.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조용히 진행되어야 한다.
장례는 ‘공간’이 아니라 ‘과정’이다.
김씨는 때때로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조문객 때문에 급히 커튼을 닫고 내부 정리를 마무리한 적도 있다.
"조문객은 5분 먼저 와도 상관없지만, 우리는 그 5분이 전쟁이에요."
한 번은 외국인 유가족이 도착해 문화 차이로 당황했던 기억도 있다.
“서양 가족들은 향 대신 꽃을 놓거나, 크게 웃으며 추모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다른 조문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도 제 몫이에요.”
감정이 터지는 현장 속에서 감정을 눌러야 하는 사람
장례식장 도우미가 되는 데 가장 큰 자질은 ‘공감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태도’라고 김씨는 말한다.
처음 1~2년 차에는 매일 눈물을 삼키며 일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손녀가 울부짖는데, 그게 꼭 제 딸 같더라고요.
그 순간 물컵을 채우면서도 손이 떨렸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익혔다.
“같이 울면 아무것도 못 해요. 누군가는 차가운 물컵도 채워야 하잖아요.”
그녀는 자신을 감정을 삭이는 ‘기억에 남지 않는 조력자’로 규정한다.
묵묵히,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김씨는 유가족들이 심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을 수없이 봐왔다.
가장 흔한 건 장례 첫날 밤, 가족들이 돌아가고 상주만 남았을 때다.
"빈소 의자에 혼자 앉아 조용히 우는 상주 분을 보면…
말은 걸 수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렵죠.
그럴 땐 따뜻한 차를 조용히 앞에 놓고 그냥 지나가요."
도우미들은 대화보다 ‘공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위로를 전한다.
가끔 유가족들이 다 돌아간 빈소에서, 혼자 제단을 정리하며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고 한다.
“내 감정이 아니라, 그날 하루에 쌓인 감정들이 밀려오는 거죠.”
노동과 처우 사이, 말없이 일하고 조용히 잊히는 존재
장례식장 도우미는 법적 직업 분류조차 모호한 존재다.
간호사도 아니고, 행정직도 아니며, 단순 알바도 아니다.
병원 정규직이 아닌 외주 인력인 경우가 많고, 일당제로 일한다.
김씨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도 정해진 수당 외에는 추가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명절에도, 비 오는 날도, 가족 행사 날에도 일을 쉰 적이 거의 없다.
“장례는 휴일이 없어요. 누군가의 마지막은 날짜를 가리지 않거든요.”
이 일은 신체적으로도 고된 편이다.
서서 일하는 시간이 길고, 조문객이 몰릴 땐 끊임없이 커피를 내리고, 물을 나르고, 쓰레기를 정리한다.
"두 다리가 저릿할 때쯤엔, 상주 분이 ‘고생 많으시죠’ 하고 말 걸어줘요.
그 말 한마디가 진짜 힘이 되죠."
김씨는 장례식장 도우미로서 겪는 사회적 무관심이 가장 속상하다고 말한다.
“가족한테 말할 때도 그냥 ‘병원 도우미’라고 말해요.
장례식장 도우미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색해하거나 대화를 피하거든요.”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존재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다.
"이별의 공간이 차갑지만은 않도록, 우리는 작은 온도를 남기고 가는 사람이에요."
김씨가 바라는 것은 기억보다 존중이다
김씨는 곧 60세를 앞두고 있다.
체력적으로 점점 한계가 느껴지지만, 아직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나보다 힘든 유가족들 보면서 버텨왔어요.
나는 적어도 건강하니까요.”
그녀가 바라는 건 크지 않다.
단지, 이 직업이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게 아니라,
장례식장에 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요즘 새로 들어온 후배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다.
비로소 ‘어떻게 조용하게 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위안이다.
김씨는 오늘도 빈소의 냉수를 채우고, 향로를 정돈하고, 의자를 맞추고, 조용히 뒷걸음친다.
누군가의 가장 슬픈 날을, 조금 덜 무너지게 하기 위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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